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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6 중국-대륙의 오지:중경,귀주,광서(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서 2

by 깜쌤 2016. 2. 15.

 

골목에서 좌판을 펼쳐두고 돼지고기를 팔던 아주머니는 임시정부청사 앞까지 우리들을 안내해주고는 돌아갔다. 나는 왔던 길을 다시 가서 되짚어보기로 했다. 나처럼 길을 못찾아서 고생하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옛성벽처럼 보이는 벽이 끝나는 곳에서 언덕위로 오르는 골목을 끼고 한 이삼십미터정도 올라오면 놀이기구와 운동기구가 비치된 작은 공터를 만나게 될 것이다.

 

 

공터에는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여러가지 기구들을 비치해두었다.

 

 

빈터는 정말 깨끗했다. 주민들이 존경스럽다. 골목탐방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중국도 깨끗한 곳은 정말 깨끗하다. 경주 어느 동네 주택가 골목처럼 지저분하지 않아서 좋았다. 

 

 

한국인들이 워낙 많이 찾아와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골목을 세심하게 단장해두었다. 나는 이런 청결함이 좋다.

 

 

우산을 든 아줌마와 아이들이 골목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도 저 골목을 통과해서 이 공터까지 온 것이다. 사람들이 나오는 저 골목을 따라 내려가면 돼지고기를 팔던 아주머니가 있던 골목입구가 된다.

 

 

공터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가자. 내려가는 계단길 바로 왼쪽에 임시정부청사가 나타났다.

 

 

계단 왼쪽에 기와를 얹은 집 몇채가 보이지 않은가? 바로 저 건물이다. 그러니까 임시정부 청사는 비탈진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애개개! 저 정도로 초라한 집이었단 말이야'하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겉만 봐서는 잘 모른다.

 

 

주민 한사람이 우산을 펼쳐들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몇걸음 더 내려가자 단층처럼 보이던 건물이 사실은 이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벽돌집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누른 색 담으로 둘러싸인 곳 전체가 임시정부구역이라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지금 사진속에 보이는 기와집과 벽돌집 모두가 임시정부 건물들이다. 그러니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계단을 밟으며 천천히 걸어내려갔다. 일부러 서두르지 않았다. 이역만리 중경까지 와서 고군분투하신 독립투사분들의 애국심을 천천히나마 음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계단을 다 내려가면 주차장이 나타난다. 그 맞은편이 임시정부청사다. 우리는 임시정부청사라는말에 익숙하지만 중국인들의 표현방식을 빌리자면 임시정부구지다. 옛 구(舊)자에 땅 지(따 地)를 써서 구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간자체로 쓰면 구지()가 된다. 중국인들에게 물어볼 때는 간자체로 써서 보여주는게 나을 것이다. 번자체로 멋있게 써서 보여주면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눈이 동그래진다.

 

 

앞으로 뻗은 골목을 따라 큰도로까지 나가면 임시정부구지를 나타내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골목끝까지 가서 본 모습은 나중에 소개해드리겠다.

 

 

나는 주차장 부근에서 돌아섰다. 왼쪽에 보이는 계단길을 통해 방금 내려왔다. 이제 진한 회색으로 칠해진 임시정부구지 진열관의 정면이 보인다. 구지 주위는 온통 고층건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자세히 생각해보니 우리는 뒤쪽에서 접근한 것이었다.

 

 

정문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랐다. 나는 계단을 오르면서부터 가슴이 먹먹해졌다. 독립투사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중국 내륙 깊숙한 곳 여기까지 흘러들어 고군분투하셨던가 싶어서였다.

 

 

정문 맞은편에는 비탈진 길이 있고 길 위쪽으로 주차장이 있었다.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셨던 당시에는 어떤 용도로 쓰였던 땅이었을까?

 

 

건물 외관은 진한 회색으로 칠해져있었다. 벽면에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

진열관이라는 표식판이 박혀있었다.

 

 

여긴 중국 지방정부에서 인정한 보호문물단위다.

 

 

입장료는 없다. 정부청사 유래는 사진속의 글을 읽어보기 바란다.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이니까 꼭 기억해두시기 바란다. 

 

 

나는 정문앞에 섰다. 아까부터 선열들의 뜨거운 애국심과 타국에서의 분투를 생각하고는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래도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어서 정말 흐뭇했다.

 

 

입구 오른쪽에 경비초소가 있는데 경비원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었다. 날이 추워서 그랬으리라.

 

 

정문에 들어가서 왼쪽 이층으로 바로 올라가면 군사활동을 중심으로 한 사진자료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는 공간을 만나게 된다. 나는 입구 왼쪽 1층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입구에 들어가서 정면을 보면 계단이 보인다 식물을 진열해둔 앞쪽 통로 좌우와 계단 좌우쪽 건물이 모두 임시정부청사 진열관으로 쓰이고 있다. 바깥에서 보던 것과는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느낌뿐만 아니라 규모에서도 많은 차이가 났다.

 

 

입구 오른쪽 건물의 모습이다. 나는 여기는 두번째로 들어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왼쪽건물 1층 전람관으로 들어간다. 벽돌건물이어서 그런지 제법 단정한 느낌이 들었다. 중앙 정면에 태극기와 백범선생의 흉상이 보였다.

 

 

임시정부청사는 총 5개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정문 좌측이 1호건물이고 맞은편은 2호건물, 2호건물 위에 3호건물이 있고 계단 제일 위쪽 왼쪽이 5호, 맞은편이 4호 건물이다. 5호건물은 관리동으로 쓰고 있는 것 같았다. 

 

 

1호건물 안쪽으로 들어가자 임시정부 약사가 소개되어 있었다. 임시정부는 제일 먼저 상해(上海 상하이)에서 수립되었다. 1919년에 있었던 3.1독립만세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지사(志士)들이 뜻을 모아 해외에서 조직한 것이다.  

 

 

임시정부 주요인사들의 전신사진이 우리들을 맞아주었다. 중국에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며 놀란 것 가운데 하나가 가운데 김구선생을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착각하고는 비난조로 글을 쓴 분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얼핏 보면 그럴 수 있다. 나는 그런 글을 보며 진한 슬픔을 느꼈다. 망국적인 지역감정에 사로잡혀 마구 비난하고 욕하는 습성은 언제쯤되어야 버릴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 분들은 평소 백범선생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단 한번이라도 보았는지 모르겠다.

 

 

백범선생의 흉상이 우리를 맞아주셨다. 그분은 1876년에 황해도 해주 백운방의 텃골에서 태어나셨다.

 

 

본관은 안동이니 안동 김씨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창암(昌巖)이라고도 했는데 원래 이름은 창수(昌洙)다. 나중에 개명하여 구(龜 혹은 九)라고 했다. 우리가 흔히 백범白凡)이라고 부르는 백범은 호가 된다.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초대 경무국장을 지내셨다.

 

 

1939년에는 임시정부 주석이 되었다. 사실 임시정부하면 백범선생만 기억하는 분들이 많은데 기라성같은 면면들이 즐비하다. 다른 분들은 백범선생의 위명에 압도되어 잘 기억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뿐이다.

 

 

1939년 김구 주석이 서명하여 발표한 일본에 대한 대일선전포고문이 보였다. 

 

 

광복군을 창설하고 난 뒤에 찍은 사진이 걸려있었다. 국사를 어설프게 공부한 사람들이 독립군과 광복군을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흔히 보았다. 

 

 

장강일기! 이런 책이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나서야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님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 

 

 

천천히 살펴보니 귀한 사진들이 많았다.

 

 

해암 안병무선생도 처음 알게된 분이었다. 나도 그동안 너무 무식하게 살았다. 이런 분들에 대해 캄캄했으니 말이다. 증명서를 가만히 살펴보니 어쩌면 여권같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속에서 모두 극심한 고생을 하셨던 것 같다.

 

 

토교 한인촌으로 가는 방향을 안내해두었다. 토교 한인촌에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분들의 가족이 모여살았다고 한다.

 

 

광복의 순간을 맞이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이 느낀 감격은 어느 정도였을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의 감격 그 이상이었으리라.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순간을 담은 사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임시정부가 환국하던날 관계자들의 서명을 모은 것이다.

 

 

큰 기대를 안고 귀국했지만 그들은 기대이하로 홀대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구선생의 서명도 보인다.

 

 

예전 청사와 경비병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었다. 

 

 

사진자료를 둘러보는 동안 나는 가슴이 먹먹해져서 할 말을 잊었다. 

 

 

나는 1호관의 중앙 공간으로 되돌아나왔다.

 

 

다른 방도 사진 중심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 증서도 기록내용으로 보아 여권을 대신하는 여행증명서같았다.

 

 

윤봉길의사와 이봉창의사의 모습도 보였다.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한 이봉창 의사다. 나는 일본의 왕을 철저히 일왕이라고 부르자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일왕을 두고 천황이라는 용어를 제일 먼저 사용한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누구였을까? 내가 이 글에서 그의 이름을 밝히는 순간부터는 이 블로그가 온전히 남아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선서문을 쓰는 순간부터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의사는 죽음을 각오하셨으리라. 두분 선서문의 내용은 거의 비슷했다.

 

 

윤봉길 의사의 부인이 겪은 고초를 우리는 어느 정도로 알고 있을까?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에 윤의사의 부인이 경영했던 작은 음식점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 음식점이 극심한 운영난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임시정부가 옮겨다닌 중국의 도시들을 표시한 화면이다. 그분들은 참으로 고단하게 여러 도시들을 옮겨다니셨다. 

 

 

앞줄 가운데 분이 누구실까? 그 분이 백범선생이시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념촬영을 하셨다.  

 

 

그 분들은 대한민국 헌법 초안도 작성하셨던 모양이다.

 

 

우리나라 현행 헌법 제 1조 1항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가 아니던가? 그분들이 만드셨던 것을 보면 참으로 대단한 선각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살아오면서 그동안 내가 중경의 임시정부청사에 얼마나 오고싶어했던가?

 

 

1호관 중앙으로 나온 나는 맞은편에 있는 2호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호관도 2층 건물인데 거기에는 회의실과 식당, 외무관련 기관들이 입주해 있었다.

 

 

독립투사들은 밥이라도 편안하게 드셨을까? 일본 특무대의 살해위협에 시달리면서 고단한 하루하루를 이어나갔을 것이다.

 

 

중경에 임시정부가 자리잡을 때 일본군에 쫒긴 중화민국의 국민당 정부도 중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우리가 잘 아는 중국공산당은 중국 북서부 섬서성의 보안이나 연안같은 곳에서 혁명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었다. 회의실의 모습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표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익숙한 성함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식당공간 한구석에는 간단한 조리시설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자꾸만 마음이 울컥울컥했다.

 

 

나라를 팔아쳐먹고 호의호식하는 개보다 못한 인간들도 있었는데 이분들은 그 나라를 찾겠다고 이 멀고 험한 곳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어찌 눈물이 솟구치지 않을 수 있으랴?

 

 

외무부라고해도 참으로 검박하게 사셨다.

 

 

외무부장 조소앙!

 

 

그 분의 사무실이다. 6.25 전쟁 때 납북당하신 어른이다.

 

 

한쪽 구석에는 간이침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2호관 한쪽 모퉁이에 작은 기념품 판매소가 있었다. 일을 보는 중국인 아가씨는 우리말을 조금 할 줄 알았다.

 

 

여러가지 다양한 제품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내가 어지간해서는 기념품을 구입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구입하고 싶은 것이 몇가지 있긴 있었다. 

 

 

나는 3호관으로 갔다. 거긴 내무부와 재무부가 자리를 잡았던 공간이다.

 

 

재무를 맡은 분들은 특히 더 고생을 했었으리라. 임시정부 살림을 살면서 활동비를 조달하고 필요한 자금을 뒷바라지해야할 처지였으니 특히나 애를 많이 쓰셨을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글이 너무 길어진듯 하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