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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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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5 아르메니아, 조지아, 터키(完

눈(Kar)의 도시 카르스(Kars) 3

by 깜쌤 2016. 2. 16.

 

여인이 박석길을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이슬람국가에서는 이방 사내가 그 지역의 여인들과 말을 섞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남자 여행객이 대놓고 여성 얼굴을 사진찍는 것은 문제를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어렸을 때도 우리나라 시골 분위기가 그랬던 것 같다. 사진기가 워낙 없던 시절이니 그런 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남의 여자에게 말을 거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던 시절이었다. 흰색 담벼락 안에서는 해당화와 흡사한 꽃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성채밑의 동네는 우리로 치자면 달동네나 마찬가지인것 같다.



눈에 들어오는 곳마다 모두 다 무너지고 사그라지는 중이었다.



무슨 용도로 쓰이는 건물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같다. 나는 호기심만 가득 끌어안은채 천천히 걸었다.



이제 성채가 바로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성문으로 이어지는 길은 이리저리 뒤틀려있는 법이다.



옛날 요새들은 높은 곳에 있었다. 그게 일반적이었다. 평지에 있는 요새는 높다랗게 쌓아올려야만 그 가치를 했다.



고개를 돌려 걸어온 길을 살펴보았다. 언덕을 오르면 오를수록 카르스 시내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카르스는 너른 평지에 자리잡은 도시다. 평지처럼 보여도 해발고도 1,700미터는 거뜬히 넘어가는 고원도시인 것이다.



코카서스로 통하는 길목이 되는 전략적인 위치에 자리잡았다는 사실 때문에 근세사에서는 러시아와 다툼을 많이 벌인 곳이다.



한때는 고지대에 위치한 성이 두터운 성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강점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대포의 사정거리가 늘어나면서부터는 그런 이점도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관광지로서의 역할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남자 둘이 아가씨와 걸어내려가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걸어올라가면 성문이 나타나리라.



붉은 지붕을 가진 집들이 곳곳에 박혀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도시가 만들어내는 색깔이 그리 단조롭지는 않았다. 



성채를 향해 곧게 뻗은 도로가 보였다. 옛날에는 저 도로가 중심가 역할을 했으리라. 지금도 그렇지 않을까?



성으로 이어지는 길 아래로 보이는 건물은 하맘일 가능성이 높다. 건물 모습이 그렇게 생겨있지 않은가?



하맘 부근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성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비가 오기 전에 서둘러 내려가는 것일까?



나는 끊임없이 사방을 살펴보며 셔터를 눌러댔다. 하나라도 더 기억속에 남겨두고 싶어서다.



어떤 이는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기도 했다. 아! 부럽다. 젊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다.



먹구름이 더 가까이 다가온듯 하다. 아래쪽으로는 햇볕든 곳이 급격하게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카르스성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이 나타났다. 서기 1153년경부터 지어졌단다. 우리와는 거의 관계없는 이름들이 등장하기에 자세하게 번역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꼭 알아두어야 할 단어하나가 등장했다. Janissary !



마침내 성문이 등장했다. 원래 성문은 이런 식으로 부실하지 않았으리라. 가까이 가서 보니 성벽이 엄청 높았다.



성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니 너른 마당처럼 생긴 빈터가 나타났다. 아래를 겨냥한 대형 철제대포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성벽에 붙어서면 카르스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포가 배치된 곳은 제법 너른 터였다. 성안에 또다른 성이 있는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더 올라가보기로 했다.



안쪽 성벽 앞에 자리잡은 건물이 아까 꼭 알아두어야한다고 했던 단어와 깊은 관련이 있다. 저 건물이 Janissary들의 숙소다.



성채 안에서 크게 볼만한 것은 없다. 하지만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찻집이 있으니 차를 마실 수도 있고 파스텔톤으로 칠해진 카르스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한가하게 시간을 죽일 수도 있다. 



Janissary !  미국식 영어로 발음하면 '제너서리' 정도로 소리가 나겠지만 터키어로는 예니체리를 의미한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군사제도를 이야기할 때 이 낱말이 빠지면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사전적 용어부터 소개해보기로 하자. 먼저 두산백과의 내용부터 소개해보기로 한다. 출처는 글상자 속에 들어있다.




예니는 새로운, 체리는 병사()의 뜻으로 ‘신군()’을 의미한다. 무라드 1세의 치세 때 창설된 것으로 보인다.

오스만투르크제국에 정복된 유럽 속령() 내의 그리스도교도 중에서 장정을 징용하여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고 엄격한 훈련을 실시한 다음 술탄의 상비친위군에 편입시켰다. 결혼하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것은 금지시켰으나 고봉()을 받고 고위 ·고관에 영전하는 등용문이었으므로 자기 자식을 지원시키는 그리스도교도도 있었다.

특히 14∼16세기의 정복전쟁에서 많은 무공을 세워 투르크병의 인기를 독차지하였으나, 뒤에는 군기가 문란해져 횡포가 심하고 술탄의 폐립()에도 개입하게 되었으므로 1826년 폐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예니체리 [Janissary] (두산백과)



 


 

 나는 예니체리 부대의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지붕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이슬람 사전에 등장하는 예니체리의 유래와 역할을 한번 더 인용해보기로 하자. 출처는 이슬람 사전이다. 




데브쉬르메(Devshirme)에서 선발된 오스만 터키제국의 정예 군대. 데브쉬르메는 발칸반도의 그리스도교도 출신 소년들로 구성된 징용군인데 이 소년들은 거의 강제로 이슬람에 개종했으며 각자의 적성에 따라 군인이나 행정관리가 되도록 양육되고 훈련받았다.

 

예니체리의 기원은 731/13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니체리와 데브쉬르메 제도는 술탄 무라드 2세(Murad Ⅱ, 855/1451 죽음)의 통치기에 더욱 발전하였다. 예니체리 군대는 술탄 메흐메트 2세(Mehmet Ⅱ)에 반항하여 1242/1826년 반란을 일으킨 후 진압되어 해체되었다.

예니체리는 오스만 터키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팽창할 때 비잔틴과 벌인 전투에서 보병부대의 필요성이 절실해지자 이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터키인들은 보통 기병으로 싸웠으나 요새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는 지금까지와 다른 군사기술이 필요하게 되어서 보병부대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들의 충성심을 확실히 하고자 예니체리는 소년기에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어른 개종자들로 구성된 다른 군대보다 예니체리 군대가 더욱 신뢰받을 수 있었다.

예니체리 군대는 처음에는 만 오천 명 정도였으나 이란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그 수가 일곱 배 정도로 늘어나게 되었다. 989/1581년 복무 중에도 결혼이 허용된 후 군대는 점점 세습화하였고, 사병선발은 군사적 능력을 무시한 채 이루어졌다. 그 결과 군대는 점점 쇠퇴해졌다.

 

군부대의 핵심으로서 예니체리는 정치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들의 힘은 간혹 재상의 교체를 명령하거나 새로운 술탄의 계승 과정이나 그 전에 엄청난 뇌물을 요구하거나 강요할 정도로 막강했다.

1242/1826년에 예니체리는 뮤알렘 에스킨지(Muallem Eshkinji, ‘고도로 훈련받은 호위병’)라는 새로운 정규군의 창설에 반기를 들었으나 술탄은 단호하게 대처하였고 또 종교당국을 설득하여 예니체리를 비방하였다. 예니체리 군대 막사를 충성스런 군대가 포위한 후 성전을 선포하는 기치를 올렸다.

 

예니체리들은 갑작스런 습격에 대부분 살해되었다. 당시 예니체리의 불명예와 치욕을 표시하기 위하여 공개적으로 그들의 깃발과 전통 머리덮개를 진흙 속으로 내던졌다. 예니체리들에게 특별했던 쑤피적인 벡타쉬(Bektashī) 종단은 불법 단체로 낙인찍혔다.

 

[네이버 지식백과] 예니체리 [Janissary] (이슬람사전, 2002. 11. 15., 학문사)



핵심은 이렇다. 주로 유럽의 점령지 기독교가정에서 소년들을 징집하여 이슬람으로 개종을 시켰고 철저한 훈련을 통해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최정예부대로 만들었으나 후에 지나치게 정치에 관여하였기에 제거당했다는 정도다.



어떤 과정을 통해 개종시켰던 것일까? 이슬람으로 개종한다고 해서 무조건 최정예병사가 되는 것일까?  근대사에서 예니체리 부대는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막사 창문을 통해 아래를 내다보았다. 이들은 전쟁기계로 양성되고 훈련받은 특별부대였다. 병역중에는 결혼도 할 수 없었고 상업활동도 금지되었다. 수많은 전투를 통해 안죽고 잘만 버텨내면 제대 후에는 엄청난 보상과 명예를 가질 수 있었기에 최정예부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들로 구성된 유명했던 전쟁기계들의 시초는 스파르타의 시민병사들과 공화정 과 제정초기의 로마군단에서 찾을 수 있지 싶다. 이들은 모두 시민계급으로서 철저한 긍지와 명예심과 자부심으로 무장한 조직이었다.



하지만 예니체리는 그렇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을 기독교가정에서 강제로 징집해간 뒤 철저한 종교교육을 통해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는 부와 명예를 보장해서 최정예부대원으로 키워냈다는 차이를 가진다. 

 

점령지의 기독교 가정에서는 아들 한명을 반드시 세금으로 내야만 했다. 세금을 징수하는 오스만 투르크측에서는 아무나 선발했던 것이 아니고 형제들 중에서 가장 신체건장한 아이만을 골라내서 데려갔다. 오죽했으면 에드워드 기번조차 예니체리를 두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철저히 모독적인 노예병사'라고 비난했을까?



예니체리 병사들의 막사에서 성문쪽을 살펴보았다. 누구든지 성으로 들어오려면 최정예부대원들의 막사밑을 반드시 지나오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주차장으로 쓰이는 곳 부근에 찻집이 있다. 



모름지기 역사에서 어떤 이가 승자로 존재하려면 그는 한없이 간악해져야한다. 순수한 인간성을 지닌 자들은 간악한 자들의 희생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 카르스성에서 제일 깊고 높은 곳까지 올라왔다. 저 계단만 오르면 제일 높은 곳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바로 그때쯤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카르스성의 앞모습만 살폈다. 나는 뒷면 모습은 어떤지 그게 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빗방울이 더 굵어지기 전에 뒷쪽 성벽으로 붙어 부근을 살펴보았다. 뒷쪽으로 깊은 골짜기가 숨어있었다. 과연 카르스성의 구조와 위치는 절묘함 그 자체였다. 

 

 

이젠 나는 카르스 성채의 제일 높은 곳까지 올라왔다. 터키인 한가족이 빗방울을 피해 황급히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관문은 잠겨있었다. 어쩔 수 없이 돌아서야만 했다.

 

 

광활한 평원(초원)에 자리잡은 카르스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늘 한쪽은 푸르기만 한데 다른 곳은 구름에 덮이면서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그게 초원이다.

 

 

성채 오른쪽 밑 파란색 담장으로 둘러싸인 지붕이 둥근 건물은 원래 아르메니아인들이 만든 교회였었다. 지금은 당연히 모스크로 개조되어 있다. 그게 역사다.

 

 

 

드디어 카르스 시가지 위에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걸음을 재촉해서 찻집을 향해 걸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