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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5 아르메니아, 조지아, 터키(完

세반을 향해서 1

by 깜쌤 2015. 9. 30.

아레니의 명물이라는 아레니 와이너리 구경은 애시당초부터 크게 마음이 없었기에 가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길래 기사와 러시아 커플이 늦은 점심을 먹는 동안 나는 마을과 꽃구경을 했었다. 운전기사가 커피라도 한잔 마시기를 권하길래 한번 마셔보기로 했다.

 

 

나는 속으로 아메리카노를 원했지만 정작 가져온 것은 달달한 커피였다. 아쉬운대로 그런 커피라도 마셔두어야했다. 커피 한잔의 가격은 200드람이었으니 우리돈으로 환산하자면 500원 정도가 될 것이다. 낮에 먹은 푸짐한 점심은 거금 3,000드람이었었다.

 

 

일행 한 분이 우리나라의 조청 비슷한 것을 한 병에 2,000드람을 주고 샀는데 가지고 다니면서 두고두고 맛있게 잘 먹었다. 뜨거운 물만 있으면 한 숟가락씩 넣고 타서 마셨는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아레니를 출발해서는 메마른 산줄기를 따라 이어진 도로를 달렸다.

 

 

예레반으로 향하는 길에 나타나는 마지막 큰 고개를 넘은 뒤 내리막길로 들어서자 석양에 그 희미한 윤곽만을 드러낸 아라랏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위 사진속에서 멀리 보이는 산이 아라랏이다.

 

 

잘 알다시피 큰 아라랏과 작은 아라랏은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알고보면 아라랏은 오래전에 마그마를 분출한 후 지금까지 활동이 멈추어버린 사화산이다. 사화산은 언젠가는 다시 살아서 꿈틀거릴 가능성이 있다. 아라랏 옆으로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었다.

 

 

아라랏이 눈앞에 다가왔지만 사실 저쪽은 터키 영토다. 여기가 예레반으로 가는 마지막 내리막길인데 저 앞에서부터 도로는 오른쪽으로 꺾여진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아라랏과 이스탄불이 터키 영토로 남은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터키인들이 들으면 엄청 기분나쁜 일일 수 있지만 이스탄불은 원래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영토였던 비잔티움을 그리스인들로부터 오스만 투르크가 뺏은 후 이름을 바꾸고 점령해온 것이지 원래부터 터키 영토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우리 민족이 한반도 너머 북쪽에 존재하는 만주를 그리워하는 것이나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라랏을 그리워하는 것이나 기본적인 감정은 같을 것이다. 역사는 항상 강자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정의는 강자가 독점하여 자기합리화를 해나가는데 사용된 것이지 약자를 보호하는데 쓰이는 개념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침에 교통사고가 났던 사고의 현장에는 아직도 경찰이 남아서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크레인을 동원해서 탱크로리에서 떨어져 나온 기름통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사고현장 부근에 가스충전소가 있었다. 기사는 차를 대고 가스를 충전했다.

 

 

잠시 동안의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나는 가스스테이션 부근을 살폈다. 

 

 

저 작은 기념물은 무엇을 기념하는 것일까?

 

 

가스충전소 직원이 가스를 넣는 동안 기사는 차에서 내려 쉬어야만 했다.

 

 

손님들이 차에서 내려 안전한 곳에 피해있는 것은 기본 상식이다.

 

 

사고를 낸 기름탱크 운반 차량기사는 이란사람이라고 한다.

 

 

가족들이 사고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놀라고 충격을 받았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가스충전소 구역을 표시하는 얕은 담장에는 붉디붉은 칸나가 마지막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는듯 꽃을 피우고 있었다. 

 

 

검은 색 히잡을 둘러쓴 여인들은 이란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녀들은 가스충전소 한쪽에 몰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스를 충전한 뒤 다시 예레반을 향해 달렸다. 북서쪽으로 달리는 것이다.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넘어가는 해를 보며 나는 내일 계획을 생각해보았다. 전체 일정으로 본다면 내일 경에는 예레반을 떠나야한다. 그래야 이스탄불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다.

 

 

예레반 입구에는 교통사고가 나있었다. 덕분에 차들이 조금 밀렸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닌 것 같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철길이 도로를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호스텔에 돌아오니 해가 완전히 빠진 뒤여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벌써 8시였다.

 

 러시아 커플에게 18,000드람을 받고 우리 몫을 더한 뒤 하루종일 수고해준 기사에게 건넸다. 정확하게 나누려다가 우리 일행이 네명이었기에 조금 더 부담하기로 했다. 팁을 조금 얹어주었는데 기사는 한없이 고마워했다. 내가 보기에 아르메니아에서 자가용으로 택시영업을 하면 돈을 쉽게 모을 수 있을것 같다. 물론 초기 사업투자비용이 엄청나리라. 새차를 한대 장만해야하므로.....    

 

 

낮에 점심을 거하게 먹었으므로 저녁은 라면을 끓여먹기로 했다. 일행중 한분이 라면을 몇개 가지고 오셨기에 배낭부피를 줄이는 의미에서 빨리 처리해버리기로 했던 것이다. 

 

 

라면 면발은 꼬들꼬들해야 제맛이지만 푹 퍼지게 만들어서 먹는 것도 맛있다. 바로 오늘같은 경우다. 우리가 라면을 먹는 동안 우리 옆자리에는 금발을 가진 이란인이 앉아있었다. 아마 돈을 벌기 위해 아르메니아에 온 것 같은데 약간 푸대접을 받는 것 같아서 보기에 안쓰러웠다.  

 

 

라면이 먹고싶을 경우 부피를 줄이려면 라면 스프만 가지고 다니는 방법도 좋다. 라면 국수는 한국에 남겨두고 현지 수퍼에서 라면을 사서 끓일때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스프를 넣어서 끓이면 한국라면 맛이 난다. 남은 스프는 절대 버리지 않아야한다. 라면 스프는 전천후 조미료로 써도 되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고나자 만사가 귀찮아졌지만 내일 일정을 결정지어야했기에 일행들을 불러 모으고 브리핑을 했다. 내일은 세반 호수를 보고 난 뒤 북쪽으로 더 올라가 딜리잔까지 가려고 마음먹었다.아무래도 전체 일정상 세반을 거쳐 딜리잔으로 갔다가 아르메니아를 떠나야할 것 같았다.

 

미스터 헤안트에게 이야기를 해서 오늘 그 운전기사에게 딜리잔까지 가도록 부탁을 해놓았다. 헤안트는 기사에게 곧 전화를 했고 15,000드람으로 가격을 마무리 지었다. 

 

 

8월 14일 금요일 아침이 되었다.오늘은 딜리잔까지 갈 생각이다.

 

 

아르메니아 돈이 눈에 익으려는데 어쩌면 곧 이별을 해야할지도 모른다. 

 

 

아르메니아 돈은 약간 촌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1,000드람이면 우리돈으로 2,500원 정도다.

 

 

동전 종류도 꽤 된다. 200드람이면 커피 한잔 정도 마실 수 있으니 적은 돈이 아니다.

 

 

아르메니아에 배낭여행을 가실 분들과 내가 다음에 다시 올 경우를 대비해서 밖에 나가 호스텔 전경을 사진찍어두었다. 오른쪽의 붉은 건물이 호스텔이다.

 

 

내가 묵었던 방이다. 창문이 없어서 조금 갑갑한 느낌을 주었다.

 

 

현관에서 들어오는 통로인데 바로 옆건물과의 틈바구니를 절묘하게 이용해서 만들었다. 역시 사람은 머리를 잘 굴려야 한다. 

 

 

리셉션 카운터 공간이지만 실제로 사람을 만나려면 2층으로 올라가는게 빠르다. 

 

 

2층 공간이다. 식당 겸 휴식공간으로 사용한다. 나는 다시 바깥으로 나가 호스텔 부근의 경치를 카메라에 담아두었다.

 

 

찾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호스텔이 굼(Gum)시장 부근에 있다는 사실만 명심하고 있으면 된다. 시장에서는 한 100여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나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을 먹기 위해서다. 

 

 

우리가 밥을 먹고 살듯이 그들은 빵을 먹고 산다.

 

 

빵만 먹으면 퍽퍽하고 맛도 그저그런 정도이니 치즈와 토마토나 오이같은 것은 기본으로 따라 나온다.

 

 

잼도 나왔다. 음식을 잘 주는 집에서는 꿀도 주고 버터도 주고 다양한 잼도 함께 차려준다.

 

 

치즈! 종류가 많으므로 이것저것 먹어보도록 하자.

 

 

그리고 달걀! 서양인들에게 달걀은 필수인 모양이다. 어떤 집에서는 반숙을 주는 수도 있으므로 함부로 깨뜨리면 실수하는 수가 생긴다. 

 

 

우리는 그렇게 아침을 먹었다. 양치를 하고 출발할 준비를 했다.

 

 

후식으로는 어제 사놓은 멜론을 먹었다. 이건 우리가 돈을 주고 산 것이다. 우리 옆에 폴란드인들이 앉았는데 그들에게도 먹어보라고 따로 접시에 푸짐하게 담아 선물했다. 그들이 폴란드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쇼팽과 센케비치를 들먹이며 얄팍하게나마 아는 척을 해주었다.

 

그런데 말이다. 마리 스끌로도프스까라는 이름은 왜 그리도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 거의 50여년전의 중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등장한 이름이었는데 그녀 이름이 왜 그렇게 낯설기만 했을까? 나는 그게 나이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머리속에 장착된 수퍼컴퓨터도 이제는 너무 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끌로도프스까는 마리 퀴리의 처녀시절 성씨였다.   

 

 

음식을 차려준 스태프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아줌마가 음식담당이다. 그녀의 출근 시간은 아침 8시였다..

 

 

식사후 밖으로 나갔다. 시골로 갈 경우 환전하는 어려움을 덜기 위해 미리 환전소로 가서 일인당 100달러씩 환전을 해두기로 했다. 환전소로 가는 길에 본 굼시장은 변함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장사꾼들은 새로운 하루를 위해 전을 차리고 있었다.

 

 

그들도 모두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들도 해외여행을 다니고 가난과 질병이라는 낱말은 모르고 한평생을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함석집 사장님도 더 잘살았으면 좋겠다.

 

 

10시 정각에 기사가 왔다. 우리는 배낭을 트렁크에 싣고 예레반 변두리의 호스텔을 떠났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