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되네르 케밥이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사와르마라고 불러야하나? 아니면 뒤륌(두름)이라고 불러야하나? 종잡을 수가 없다. 닭고기나 양고기를 꼬챙이에 꽂은 상태로 불에 익혀서 얇게 썰어낸 뒤, 밀가루로 만든 얇은 빵으로 말아낸 음식이라고 보면 된다.
빵과 고기만 먹으면 퍽퍽하기도 하고 먹기가 힘들므로 고기를 넣어서 말아낼 때 토마토와 양파같은 것을 함께 넣고 소스를 듬뿍 뿌리기도 한다. 그 정도만 하면 한끼 식사로 정말 든든하다. 우리는 거리의 벤치에 앉아 한 끼를 떼웠다. 지쳤던 몸이 곡기를 느끼자 힘이 다시 솟아 올랐다.
우리는 공화국광장 앞을 지나쳐 집으로 향했다. 국립미술관 전면에는 2015라는 숫자가 가득했다. 앞글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2015년 올해는 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안 대학살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걸 잊지말자고 외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숫자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종류의 사건들은 가해자가 충심으로 사과를 하면 그런대로 해결되는 것이지만 그런 양심적인 국가는 보기가 힘드는게 현실이다. 집으로 돌아오다가 원두 커피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다. 구수한 향기가 나그네의 입맛을 자극했다.
땡볕에 지쳐버린 터라 그늘이 필요했기에 우리는 굼 시장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엄청나게 많은 난전들이 시장안에 가득했다. 과일가게에서 수박 한 덩어리를 샀다.
1,000드람을 주고 샀으니 수박 한 덩어리에 우리돈으로 2,500원 정도인 것이다. 그 정도만 주어도 수박이 크고 실했다. 수박을 호스텔 냉장고 속에 넣어두었다가 꺼내 먹음으로서 더위를 식혔다.
우리가 묵었던 곳이 호스텔이니만큼 손님용 냉장고와 요리장비가 잘 갖추어져 있었다.
어떤 나라에서는 호텔과 호스텔의 역할이 그렇게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았지만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에서는 그런 구별이 거의 명확한듯 했다.
아르메니아에 발을 디딘 첫날이어서 너무 무리하게 일정을 소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응접실에 앉아 비치된 잡지를 뒤적거리며 쉬다가 기사에 등장한 사진이 눈에 익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있었다.
아르메니아 글자나 러시아 글자는 읽을 줄을 모르지만 사진이야 그런 것이 아니므로 직감적으로 어디서 본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가만히 보니까 잡지 속에 등장한 인물이 아침에 만났던 이집 여자사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잡지를 들고가서 확인해보았더니 사실이었다. 잡지 속에 소개된 기사는 우리가 묵고있는 인터호스텔에 관한 것이었다.
홈페이지 주소도 함께 나와있기에 소개해본다. 잡지에 소개된대로 입력하면 아르메니아어나 러시아어 화면이 뜰 가능성이 높다. 영어로 된 주소를 아래 글상자 속에 소개해두었다.
잠시 쉬었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굼 시장부근에 있는 백화점 3층에 올라갔더니 그럴 듯한 음식점이 하나 보였지만 저녁 8시까지만 영업을 한단다. 벌써 7시 반이나 되었는데.....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자본주의 정신이 스며들기 시작했는지 서빙을 담당하는 종업원 아가씨가 들어오라고 한다. 제일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토마토 주스 한 잔과 볶음밥을 주문했지만 결과는 대참패였다.
중국 신강성의 우루무치에서 먹은 위구르인들의 볶음밥과 외모는 비슷했지만 맛은 천양지차였다. 간을 적게해서 그런지 약간 닝닝하다는 느낌이 들었던데다가 기름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해서 느끼한 맛이 가득했다. 그들에게는 맛있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으리라.
중심가 야경이 대단하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야경을 보러 갔다. 낮에 보았던 대성당에도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예배당을 비추는 조명이 한결 돋보였다. 원래의 건축재료가 가지는 느낌과 색깔을 잘 살린 조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햄버거 가게를 보자 차라리 햄버거 하나로 저녁을 떼우는게 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두리 음식점은 저녁 7시반만 되어도 문을 닫는 분위기였지만 중심가로 다가갈 수록 늦게까지 문을 여는 것 같았다.
구소련시대의 유산이라고 생각되는 거대한 아파트에도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멋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없는 덩치만 커다란 아파트에서 이 나라 인민들이 공산주의를 겪으면서 이어져 온 가난함을 느낄 수 있었다.
트롤리버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구시대의 유산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공해유발요인이 적다는 점에서는 새롭게 각광을 받는 존재이기도 하다.
도시 곳곳에 가로등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벌써 어둠이 제법 많이 내려앉았다.
우리들 앞에는 젊은 부부가 쌍동이 딸을 데리고 걸어가고 있었다.
정부청사 앞에 이른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낮에 보았던 한산함과는 전혀 다른 굉장한 인파들의 복닥거림이 광장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공화국 광장 사면에는 사람들과 차들로 메워져 있었다.
국립미술관 앞쪽에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넜다. 아르메니아 차들은 우리나라의 운전자들에 비하면 신사들이 운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많은 인파들은 어디에 숨어있다가 이제사 나온 것일까?
미술관 앞 분수대 주변에는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이 가득 앉아있었다. 어쩌면 더위를 잊으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 구경을 위해 나와 앉아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많은 인파를 만날 수 있었다면 진작에 시내로 나들이를 나갔을 것인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화국 광장을 둘러싼 모든 건물의 조명이 예사롭지 않았다.
갑자기 이 나라 사람들의 문화생활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라는 궁금증이 들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돈이 가득하다고 해서 모두가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를 즐길 수 있으려면 경제적인 수준에 걸맞은 교양과 지식이 있어야한다.
돈은 많은데 교양과 품격이 없으면 졸부근성을 드러내기에 딱 알맞다.
우리 주위에 그런 인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예레반에 가득한 카페와 서울 강남의 카페를 단순비교할 수 있을까?
참 신기하게도 옷차림새가 후줄근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낮에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던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쪽도 인파로 넘쳐나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카페마다 사람들이 그득했다. 어떤 이들은 커피를 마시고 어떤 사람들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맥주 한 병을 시켜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아이스크림 가게앞에 몰려 손에 손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들고 환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카페에는 젊은이들만 자리를 독점한게 아니었다.
거리에는 활력이 가득했지만 소란함은 없었다.
거리마다 빌딩마다 넘치는 이 활력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명품가게도 그리 한산하지는 않았다. 시민들은 어쩌면 단순히 윈도우쇼핑만을 즐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페라하우스까지만 걸어가보기로 했다.
케스케이드의 야경이 그리도 멋있다고 하지만 갔다가 돌아오는데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아서 포기하기로 했다.
거리 끝머리에 오페라극장(=오페라하우스)가 나타났다. 우리는 그 정도만 보고 돌아섰다.
9시 정각이 되자 공화국광장의 분수대에서는 분수쇼가 시작되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등장했던 주제 음악과 영국의 로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던 <훅드 온 클래식> 음악에 맞추어 분수대에서 솟아오른 물줄기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에 품격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아서 좋았다. <훅드 온 클래식>은 얼마만에 들어보는지 모른다.
분수쇼를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자리를 떴다.
도심의 화려한 분수 쇼와는 상관없이 구 소련시대 때 생산된 구형 미니버스가 우리가 묵고있는 인터호스텔 부근에 조용히 정차되어 있었다. 그게 아르메니아의 현실이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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