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cade!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케스케이드'지만 현지인들은 '카스카데' 정도로 소리내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현지인들에게 위치를 물을 때는 카스카데라고 말하는게 낫다.
계단식 정원으로 만들어진 이 아름다운 공간에는 멋진 예술작품들이 건물 내외에 전시되어 있다. 예레반의 랜드마크격에 해당하므로 꼭 가보는 것이 좋다.
더위에 지쳤을 경우에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건물 안에는 꼭대기층으로 오르는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으므로 힘 안들이고 내부 전시물을 다 구경할 수 있다.
제럴드 카페스지안(Gerard Leon Cafesjian)이라는 인물이 살았다. 1925년에 태어나서 2013년 9월 15일에 영면하신 분이다. 카페스지안 가족재단과 카페스지안 박물관 기금같은 것을 만든 양반인데 사업가며 자선사업가, 그리고 박애주의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부모는 터키 정부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사건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터키 정부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사건이 1915년에 있었으므로 그는 그 사건이 있은지 10년후에 미국 뉴욕의 부르클린 옆 동네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러니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라고 보면 된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오해하여 인터넷상에서는 그가 유대인의 후손인 것처럼 묘사한 글도 있는데 정확한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봐야한다. 디아스포라의 원래 뜻은 제정 로마시대때 팔레스타인 땅에서 강제추방을 당한 유대인들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오늘날에는 좀더 광의적으로 해석하여 어쩔 수 없는 형편에 의해 고국이나 고향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카페스지안이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의 후손이라고 말을 할때는 아르메니아 유대인의 후손이라는 말이 아니고 타의에 의해 아르메니아를 떠나서 제3국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 사람의 후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는 말이다.
제럴드 카페스지안은 세계제2차대전때는 태평양에서 함선근무를 했다. 그러다가 간호사 출신 클레오 토머스라는 여자를 만나 결혼한다. 웨스트 퍼블리싱이라는 언론그룹에 입사하는 것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한 그는 언론그룹내에서 상당한 고위직까지 올랐다가 은퇴한 후 아르메니아를 돕기 위한 자선사업에 나서게 된다.
예술품수집가로서도 명성을 쌓은 그는 1991년에 공사가 중단된 예레반의 케스케이드 조성사업에 돈을 대었는데 그가 아르메니아를 돕기 위해 그동안 재단을 통해 출연한 돈만해도 1억2500만 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5년 가을 기준으로 치면 1억달러가 1200억원 정도에 해당하니 그가 기부한 금액을 대강 계산해도 1500억원쯤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가 출연한 돈을 바탕으로 공사를 재개한 아르메니아 정부는 2009년 가을에 1차공사를 마칠 수 있었고, 그해 11월에는 그의 이름을 따서 카페스지안 박물관이라는 이름을 헌정함으로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케스케이드 내부와 정원에는 소문난 멋진 예술작품들이 수두룩하다. 저번 글에서 언급한 페르난도 보테로의 작품만 해도 그게 어디 예사로운 작품이던가? 그외에도 린 차드윅이나 배리 플라나간의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는 멋진 공간인 것이다.
거기에는 한국인의 작품도 소장되어 있다. 바로 위 사진속에 그 모습이 조금 등장했다.
바로 이 작품이다. 동영상을 보고 싶은 분들은 아래 주소를 클릭해보기 바란다. 작품제작자는 한국인 지용호씨다.
주소를 누르면 유투브안에서 관련동영상도 함께 뜰 것이므로 어떤 식으로 만들었는지,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지용호씨가 만든 다른 작품을 더 보고 싶다면 아래 글상자를 클릭해보면 된다.
여행은 아는 만큼만 보는 법이다. 모르고 보면 케스케이드 안에 전시된 작품들이 조잡하게 보이겠지만 알고서 보면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멋진 전시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나는 작품들을 훑어보다가 한번씩은 계단식 정원에 나가 예레반 시가지의 경치를 감상했다.
한국인 예술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자긍심을 느끼고 본전을 뽑을 수 있는 곳이 케스케이드다.
케스케이드는 현지인들과 관광객들이 들끓는 곳이기도 했다. 이 계단에 서서 보면 도시 바로 너머로 5,000미터 이상의 높이를 자랑하는 아라랏산이 만년설을 인 상태로 눈앞으로 바짝 다가선듯이 보이는 멋진 장면을 볼 수 있다.
내가 갔던 날은 너무 더워서 그랬을까? 옅은 연무가 도시를 감싸고 있었기에 아라랏의 위용을 살펴 볼 수가 없었다.
멀리 보이는 오페라극장 너머로 아라랏이 떠올라야 하지만 그런 멋진 장관을 놓쳐버렸으니 아깝기 그지 없었다.
나는 다시 케스케이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전시실 안은 시원하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기 때문이다.
매 층마다 경비원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작품에 손을 대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다.
소장품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작품에 손을 대는 일도 벌어지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한번씩 그런 행동을 하는 모양인데 실수로 봐주기에는 도가 지나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가 소국이라고 생각해서 함부로 하는 행동이라면 정말 곤란하다.
여기에 전시된 작품들은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이 주를 이룬다.
어떤 층에서는 물이 흐르기도 했다. 분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곳에서는 한결 시원함이 느껴졌다.
다이빙자세를 취하고 있는 조각품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성거렸다.
여기에서 아라랏을 보는 것이 일품이지만 멋진 장면을 놓쳐버렸으니 내일은 아라랏산 바로 밑에까지 가서 아르메니아인들이 영산으로 여기는 아라랏산을 쳐다볼 생각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이 느끼는 아라랏은 한국인들이 백두산을 볼 때 느끼는 심정과 같은 것이리라.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까지 백두산을 가보지 않았다. 우리민족이 성산으로 여기는 백두산을 중국땅을 통해 찾아가본다는 것이 너무 억울했기 때문이다.
나는 케스케이드 야와정원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지도에 의하면 오른쪽 어딘가에 이 나라의 대통령궁이 있어야 했으므로 그럴듯한 건물을 찾아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대통령궁이 어디쯤 있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제 제법 높이 올라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마침내 마지막 층까지 올라와버린 것이다.
꼭대기층 정원에서 사방을 살펴보면 위로 오르는 통로가 따로 마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다시 한번 더 예술 작품을 살펴보았다.
그런 뒤에는 바깥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갔다.
케스케이드 위로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깥이 엄청 뜨거웠지만 힘을 내어 케스케이드 뒤쪽 언덕 위로 올라가는 통로를 따라 걸었다.
아직도 공사는 더 진행되어야 하는 모양이다.
통로가 끝나는 곳에는 도로가 나타났다.
이런 것을 보면 예레반이 언덕에 세워진 도시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시가지의 중심이 되는 언덕에다가 케스케이드를 조성한 것이다.
누구였던가? 그런 멋진 아이디어를 처음 생각해낸 사람이.....
물론 알렉산더 타마니안이다. 러시아인으로 태어난 그는 아르메니아를 너무 사랑해서 나중에는 아르메니아로 이주해왔다. 결국에는 아르메니아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의 조각상이 케스케이드 앞 광장에 있었는데 사진찍는 것을 놓쳐버렸다. 참으로 바보같은 짓을 해버린 셈이다.
아직도 공사중인 시멘트 덩어리 계단을 걸어올라가면 하늘로 높이 솟아오른 탑을 볼 수 있다.
이때쯤엔 나도 지쳐버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돌아선다면 진정한 여행객이라고 할 수 없다.
계단에는 짙은 그늘이 져있었기에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엄청 시원했다.
다시 용기를 내어 계단을 걸어올라갔더니 너른 광장이 등장했다. 광장 끝에는 탑이 솟아 올라있었다.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전승 50주년 기념탑이다. 아르메니아가 지금은 독립국이지만 1991년까지는 소련에 속해있었던 나라다. 소련으로부터 떨어져나와 독립한 해가 1991년이다.
1945년에 독일이 세계제2차대전에서 패망했으니 50주년이라고 하면 1995년이 된다. 그렇다면 이 탑이 가지는 의미와 상징성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나는 광장앞에 서서 다시 한번 더 예레반 시가지를 살폈다. 아라랏이 한낮의 연무에 가려버린 것이 너무 마음 아프다. 저 지평선 끝머리에 영산 아라랏이 우뚝 솟아오른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나는 론리플래닛을 꺼냈다. 위치를 확인할 것이 하나있었다. 아르메니아를 상징하는 어머니상이 이 부근에 있어야했기 때문이다.
오른쪽 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왼편 언덕 위에서 문제의 동상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일행들에게 가보겠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침묵이었다. 워낙 더워서 모두를 기진맥진해버린 모양이다. 그렇다면 가보는 것을 과감하게 포기해야한다.
이젠 내려가는게 최선의 선택이다.
태양은 뜨겁고 배는 고픈데 음식점은 물론이고 간이매점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다들 도망가서 숨었는지 모르겠다.
케스케이드까지 돌아가서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맨 아래층에는 전시실이 있었다. 여기를 그냥 나가버리면 다음에 또 다시와서 볼 수 있는 그런 기회는 영영 없을게 확실하므로 안에 들어가보기로 했다.
아기자기한 공예품들이 가득했다.
구입하고 싶은 물건들이 많았지만 애써 참았다.
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구경도 좋지만 이러다가 일행들로부터 원성을 받지나 않을까 싶어 조바심이 났다. 아직도 점심을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페라하우스쪽으로 걸었다.
눈을 사방으로 돌려 음식점을 찾았다.
오페라하우스를 지나고나서야 음식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터키식으로 말하자면 케밥가게를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아르메니아식 요구르트와 케밥 하나를 주문했는데 가격은 800드람이었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자면 2000원인 셈이다.
점심대용 음식을 받아들고는 앉아서 먹을 장소를 찾아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어리
버리
'배낭여행기 > 15 아르메니아, 조지아, 터키(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라랏과 마주서다 - 코르 비랍 1 (0) | 2015.09.18 |
---|---|
밤이 살아 움직이는 도시 - 예레반 (0) | 2015.09.17 |
케스케이드 - 예레반의 명물 1 (0) | 2015.09.14 |
예레반 중심부를 걷다 (0) | 2015.09.12 |
진실게임과 정부청사 (0) | 2015.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