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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5 아르메니아, 조지아, 터키(完

아라랏과 마주서다 - 코르 비랍 2

by 깜쌤 2015. 9. 21.

 

아르메니아의 역사는 깊고도 길다. 역사의 깊이와 길이면에서는 결코 우습게 볼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아의 대홍수가 있은 후 노아의 후손들은 다양한 방향으로 흩어져 갔다. 대홍수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들이 쓰잘데기 없는 전설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고대사에는 노아의 후손들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와 그들에게서 유래한 여러 민족의 이름들이 전해지고 있다. 아무튼 노아의 정통 후손들이 건설한것으로 알려진 나라가 우라르투왕국이다. 

 

 

우라르투 왕국의 실체를 부인하는 역사학자들은 거의 없다. 성경속의 기록을 바탕으로 깔고 이야기를 해도 되지만 객관성과 공정성을 위해 다른 자료를 인용해보기로 하자.

 

 

바로 위 사진은 이번 여행에서 구해온 책에서 가져온 자료다. 터키 수도 앙카라의 아나톨리아 박물관에서 구해왔다. 우리나라 돈 가치로 치자면 약 3만 2천원짜리책인데 사진과 지질, 그리고 내용면에서 뭐 하나 나무랄 것이 없는 고급 서적이었다.

 

지도 우측 상단에는 세개의 호수가 보인다. 제일 위쪽이 아르메니아에 있는 세반 호수다. 오른쪽 아래의 호수는 이란에 있는 우르미아 호수이고  왼쪽이 호수다. 우라르투 왕국은 이 세 호수를 연결하는 삼각형 부근에 터를 잡았었다고 여기면 된다. 한때는 수도를 반 호수 가의 절벽 위에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우라르투 왕국은 훗날 메대(메디아)왕국에 의해 멸망당한 뒤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훗날 독립해서 아르메니아 왕국을 건설하여 맥을 이어오게 된다. 공화정 로마와 제정 로마 시대에 아르메니아는 로마와 파르티아(=페르시아)사이에서 양대 세력의 균형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나라없이 떠돌아다니는 민족가운데 세계인의 이목을 끄는 중동지방의 민족이 하나있다. 이름하여 쿠르드족인데 어떤 이들은 쿠르드족이 메디아(메대)왕국을 건국한 사람들의 후손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라랏 부근에 터를 잡고 살았다. 오늘날의 터키 동부와 이란 북서부, 현재의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러시아 식으로는 그루지아) 정도를 생각하면 되겠다. 그들은 파르티아의 힘이 강해지면 파르티아제국의 영향권 아래 들기도 하고 로마 세력이 뻗어오면서부터는 로마편을 들기도 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줄타기 외교를 벌여온 것이리라.

 

 

하지만 그들의 역사가 불행하기만 했었다고 보면 곤란하다. 한때는 중동지방에서 강대국 행세를 한적도 많았기 때문이다.

 

 

서기 300년 약간 전,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1,700여년 전에 트르닷 3세라는 이름을 가진 이교도 왕이 아라랏 산록 부근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라에 번지기 시작한 기독교를 탄압할 목적으로 수르프 그리고리 루사보리치라는 이름을 가진 성자를 깊이가 12미터나 되는 지하감옥 속에 감금했다. 

 

 

그 성자는 '위대한 계몽자'라는 별명을 지닌 크리스찬이었다. 지하 감옥에 갇힌 그를 돌보아준  것은 같은 신앙을 가진 아르메니아 여자였다. 비밀리에 음식도 전해주고 가끔씩은 세탁물을 모아 빨래도 해주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날부터인가 왕은 발광하기 시작했다. 미쳐가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런 그를 정상인으로 되돌아가도록 치료해준 사람이 12년 동안이나 지하감옥에 갇혀있던 성(聖) 그리고리였다.  

 

 

왕은 이 일을 계기로 하여 그리스도교를 공인했다. 그게 서기 301년의 일이다. 세계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국가는 로마가 아니라 바로 아르메니아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그로부터 12 뒤인 서기 313년의 일이다.

 

 

성 그리고리가 감금당했던 곳에는 나중에 수도원이 들어섰다. 우리가 지금 둘러보고 있는 곳이 바로 그 현장이다. 수도원 건너편에는 노아의 방주가 닿았다는 아라랏이 우뚝 솟아올라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아라랏은 커다란 두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오른쪽이 대 아라랏이고 왼쪽은 소 아라랏이다. 평지에 우뚝 솟아있으므로 그리 높지 않다고 여기기 쉬운데 지금 우리가 서있는 곳의 해발고도가  벌써 2,000미터 내외가 된다고 여기면 틀림없다. 

 

 

최고봉은 높이가 5,165미터나 된다. 한여름에는 대 아라랏의 산봉우리 꼭대기에만 만년설이 조금 남아있는듯이 보이지만 여름철에도 비가 오고나면 위쪽으로는 눈이 덮인 지역이 크게 늘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08년에 터키를 갔을 때는 사진에 보이는 아라랏의 반대편에서 중턱 정도까지 올라가본 적도 있다. 

 

 

나는 지금 아르메니아의 코르 비랍 수도원에서 이제는 터키 영토가 되어버린 아라랏을 살펴보았던 것이다. 아라랏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민족과 국가를 상징하는 상징물이나 다름없다. 이런 이야기가 하나 전해온다.    

 

 

외교관들로 이루어진 터키 대표단과 아르메니아 대표단이 외교전을 펼치던 현장에서 마주쳤다. 터키 외교관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라랏은 엄연히 터키 영토인데 왜 아르메니아 측에서 여러가지 상징물로 쓰고 있는거요?  정말 웃기는 일 아니오?"

그러자 아르메니아 외교관이 조용히 응수했다.

"터키 국기 속 있는 초승달과 별은 터키 것도 아닌데 왜 버젓이 사용하고 있는거요? 그건 더 웃기는 일이 아니오?"

 

 

터키와 아르메니아가 원수지간이라는 사실은 그들 사이에 벌어진 역사의 흐름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와 터키 사이에는 2015년 초가을 현재 국경선이 열려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두자. 따라서 여행자는 터키에서 바로 아르메니아로 갈 수 없고 아르메니아에서도 바로 터키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우리 팀의 최종 목적지는 터키의 이스탄불이다. 이스탄불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귀국길에 올라야하므로 반드시 우리는 터키로 넘어가야했기에 아르메니아와 국경를 맞대고 있는 조지아로 이동해야했던 것이다.

 

 

코르 비랍과 아라랏산 사이에는 너른 평지가 있지만 거기에 국경선이 그어져 있다. 나는 그게 마음 아팠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후 러시아를 대표했던 레닌과 터키를 건국한 케말 파샤 사이에 맺어진 조약에 의해 아라랏은 터키 영토가 되어버렸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그 사실이 두고두고 마음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일본놈들이 우리 조상들이 이주하여 개척했던 간도지방을 저들 마음대로 중국에 넘긴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는 강자편에서 흐른다. 그게 국제사회의 정의이기도 하다.  

 

 

나는 수도원 안에 존재하는 작은 예배당의 안팎을 두루두루 살폈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는 제비들이 참 많이도 보였다. 이 제비들은 가을철에 어디까지 날아가서 겨울을 나는 것일까?

 

 

수도원 안의 예배당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아이들이 세례를 받을 때도 쓰고 결혼식 장소로도 사용하는 모양이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성지나 마찬가지리라.

 

 

예배당 안에는 성스러운 느낌이 가득했다. 건물을 번듯하고 화려하게 잘 지어야만 성스럽게 느껴지는게 아니다. 사용하는 인간이 성스럽게 대해줄 때 비로소 건물이 성스러워지는 것이다. 

 

 

앞면에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돔에 뚫린 채광창을 통해 햇살이 예배당 안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한쪽 벽에는 여성예배자들을 위한 머리에 걸치는 수건들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석관 몇개가 안치되어 있었다. 무덤이라는 말인데.....

 

 

누가 영면하고 있는 것일까?

 

 

코르 비랍은 '깊은 우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물인지 지하감옥인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한번은 찾아보고 가야하는 것 아닐까?

 

 

좁은 지하로 내려가는 곳은 두군데에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 보고 있는 곳은 그리 깊은 곳이 아니었다. 나중에 찾아본 곳이야말로 코르 비랍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장소였다.

 

 

바닥에 내려가보았더니 작은 예배공간이 있었다. 나는 다시 올라와서 다른 곳을 찾았다.  

 

 

수직으로 철제 사다리가 걸쳐져 있는 곳이 문제의 현장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보기로 했다. 미끄러질 경우에는 대책없이 떨어질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바닥으로 살살 내려가보았다. 생긴 모습을 보면 우물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바닥 한구석에는 예배처소라고 생각되는 공간이 있었다.

 

 

훗날에 만든 것이겠지만  성화도 걸려있었다.

 

 

성 그리고리가 이곳에 갇혀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지 간에 그는 아르메니아 12사도교회의 첫번째 총주교가 되었다. 당연히 아르메니아는 기독교국가로 변모했었고.....

 

 

벽면에는 오랜 세월동안 촛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제는 올라가야 한다. 지하에서 십이년을 버틴 그리고리(그레고리)는 어떤 성품을 지닌 분이었을까? 어떻게 그 긴 세월을 견뎌내었을까?

 

 

나는 갑갑증과 폐쇄공포증때문에 잠시 지체하는 것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밖으로 나왔더니 살것 같았다. 숨이라도 마음껏 쉴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다른 쪽 건물 바닥에는 화장실로 쓰는 공간이 보였다. 호기심에 괜히 뚜껑을 열어보았다가 독한 냄새만 실컷 맡았다.

 

 

어느 정도 둘러보았으니 이젠 나갈 때가 되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