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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5 중국-붉은기의 흔적:강소,호남(完)

명효릉의 주인 2

by 깜쌤 2015. 8. 6.

 

통로를 따라 나가면 다시 돌로 쌓은 작은 벽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벽면 중앙을 자세히보면 무슨 글씨가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차산명태조지묘(此山明太祖之墓)" - '이 산이 바로 명태조의 묘이니라'는 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벽면 뒤에 있는 산이 무덤이라는 말이니까요. 나는 무덤의 규모를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왼쪽에 보이는 큰 벽면이 방성이고 그 오른쪽 벽면에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것이죠.

 

 

나는 경사로를 따라 위로 걸어올라갔습니다. 방성 위로 올라가보기 위해서입니다.

 

 

경사로에서 보니 무덤의 규모가 슬슬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맙소사! 무덤은 그냥 숲이 우거진 작은 산봉우리였습니다.

 

 

방성위에 올라가보니 거대한 성문위에 올라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명루(明樓) 속에도 들어가봐야지요.

 

 

나는 방성과 명루의 엄청난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방성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이 환하게 보였습니다.

 

 

성가퀴도 비에 흠뻑 젖었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더 성가퀴에 의지하여 아래를 굽어보았습니다. 한사람을 위해 이런 거대한 무덤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요? 하지만 그런 소박한 생각은 권력의 정상에 서보지 못한 자의 세계관일지도 모릅니다.

 

 

기념품 판매대 비슷하게 변해버린 명루 건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건물 내벽에는 명나라 황제들의 무덤에 관한 안내도가 붙어있었습니다.

 

 

북경에 있는 명13릉에 관한 안내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나는 관심이 있는 황제의 능만 살펴보았습니다.

 

 

밖에는 진눈깨비가 내리는 가운데 평범한 길을 걸어온 깜쌤같은 어리바리한 인생이 황제의 능을 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명루 안을 어떤 식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중국인들도 고심을 많이 헸을 것 같습니다.

 

 

명태조 주원장의 무덤인 효릉에 관한 설명을 하면서 주원장의 일생도 간략하게 설명해두었습니다. 열일곱살에 중이 된 사실도 기록해두었습니다. 그랬어야할만큼 먹고 살기가 힘들었을테지요.

 

 

그랬던 그가 새로운 나라를 개국하고 태조가 되었으니 정말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는 말이 됩니다. 

 

 

나는 다시 경사로를 걸어서 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냥 돌아서기가 아까워서 무덤 위로 난 길을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봉분 자체가 하나의 산봉우리입니다. 직경이 약 400 미터에 이른다니 할 말이 없습니다. 

 

 

황제의 봉분 위로 길이 나 있었습니다.

 

 

몇걸음 걷다가 말고 뒤돌아다보니 방성과 경사로가 저만치 뒤로 물러나 있었습니다. 

 

 

봉분 위로 길을 만들어둔다는 중국인들의 발상이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산책로를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꼭대기까지 이르렀다가 밑으로 내려가니 거대한 돌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벽면은 예사 높이가 아니었습니다.

 

 

봉분을 둘러싼 벽이 성벽처럼 느껴졌습니다. 성벽같은 돌벽이 작은 산봉우리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죠. 벽으로 둘러싸인 그 안쪽 영역이 모두 무덤이었던 것입니다.

 

 

외부인의 침입을 막고 도굴의 위험성을 없애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안전장치였던 것일까요? 나는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나왔습니다.

 

 

인간 한사람이 절대권력을 휘두를 경우, 자기 자신과 특정인을 위해 얼마나 무지막지한 일을 벌일 수 있는지를 배웠습니다.  

 

 

명태조 주원장은 자기 손자에게 안전한 황제의 자리를 보장해주기 위해 수만명의 고귀한 목숨을 처단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 황제 후보였던 큰 아들(주표)이 일찍 병사했기에 나이 어린 손자(나중에 황제가 됨. 2대 황제 건문제)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그는 개국공신이든 누구든 가리지 않고 약점이 잡히는대로 무자비하게 처벌했습니다. 어떨 땐 없는 잘못도 만들어내어 처단했습니다. 공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토사구팽도 그런 토사구팽이 없었습니다.

 

 

처단방법도 잔인하기 그지 없어서 사람을 박제로 만들기도 하고 살을 저미기도 했다니 누가 봐도 광적인 면을 드러내보였습니다. 

 

 

태조 주원장이 죽고난 뒤 손자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만 결국 자기 삼촌(주체, 3대 황제 영락제)에게 황제의 자리를 빼앗기고 맙니다. 그 얼마 뒤에 조선에서는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밀어내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죠.

 

 

권력에 중독되면 무자비한 일도 쉽게 벌이는 것이 인간사인가 봅니다.

 

 

세조나 영락제나 일단 권력을 쟁취하고 난 뒤에는 정사에 몰두하여 나름대로 치적을 쌓아나갔습니다.

 

 

효릉의 정문격인 문무방문을 나와서 앞으로 쭉 뻗은 참배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이제는 신도(神道)를 걸어봐야할 차례입니다.

 

 

마지막으로 황릉의 구조도를 다시 한번 더 살펴두었습니다. 효릉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유명합니다.

 

 

무덤 자체의 구조가 장대하기도 하지만 명청시대의 황제들의 무덤은 주원장의 효릉을 황제릉의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효릉의 정문은 따로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정문을 찾아나서는 것이죠. 동문으로 들어온 것 때문에 역순으로 구경하는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진눈깨비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눈이 오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눈이 오면 모든 것을 덮어버리기 때문에 유물들을 못보고 지나칠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참배로를 나와 휘어진 길을 걸었더니 저 앞에 패방 비슷한 것이 나타났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신도를 바르게 찾은 듯 합니다.

 

 

앞에 패방이 보입니다. 패방을 나서면 신도가 이어지겠지요.

 

 

신도(神道)를 따라 걸으면서 다양하게 배치된 석물을 찾아보는 것도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입니다. 왕릉이든 황릉이든 구별없이 말이죠. 효릉의 신도는 참으로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궁금하시지요? 그 비밀은 다음 글에서 드러납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