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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5 중국-붉은기의 흔적:강소,호남(完)

대륙과 대만에서 다같이 추앙받는 분이 중산릉에 묻혀있습니다

by 깜쌤 2015. 8. 4.

 

쑨원이라는 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살아오면서 그 분 이름을 한번도 들어보지 않았다고 하면 위인전 읽기와는 담을 쌓은 분이라는 증거가 되겠지요.

 

 

대륙을 차지한 중화인민공화국(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국)과 타이완섬을 근거지로 하는 중화민국(대만, 타이완) 양쪽에서 모두 국부 대접을 받는 분이 쑨원, 즉 손문선생입니다. 성과 호를 따서 손중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손문은 남경의 자금산자락에 묻혀있습니다. 자금산을 다른 말로 종산이라고도 부릅니다. 우리는 지금 손문이 묻혀있는 증산릉의 입구에 와있는 것이죠.

 

 

파란색 기와를 얹어놓은 패방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일직선으로 쭉 뻗은 길이 나타납니다. 

 

 

 보통 황제의 무덤을 능()이라고 부릅니다. 중산 손문은 황제는 아니었지만 그의 무덤을 두고 중산릉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그만큼 중국인들의 가슴속에 위대한 위인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능문앞까지 왔습니다.

 

 

손문은 오늘날의 중국 남부 광동성 출신입니다. 홍콩에서 서의서원이라는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전해지는 수재였습니다.  

 

 

의사가 되었어야 할 사람이 혁명가가 되었고 나중에 중국의 국부가 되어 존경받는 인물이 된 것을 보면 범상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일본에 거주하면서 활동한 부분이 많이 등장합니다. 일본여성과 결혼하기도 했고 많은 일본인들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한 사실이 있지만 그래도 후대의 중국인들로부터 친일파로 매도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 속에 등장하는 중요인물들이 받은 인물평과 견주어보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듯 합니다. 좁은 국토안 한쪽에서 특정인물을 영웅 취급할 때 다른 한쪽에서 서슴없이 비하하는 모습을 보면 결국 그 근본은 편협하고 치사한 지역감정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게 이념의 차이에서 온 것이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않다고 봅니다. 근원은 치졸한 인간심리에서 나온 편협한 지역감정때문일 것입니다. 중국처럼 거대한 나라에서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습니다만....

 

 

능문을 들어서서 위로 걸어올라가면 거대한 비석이 들어있는 비각을 만납니다. 모든 건물들이 일직선상으로 늘어서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중화민국 18년 6월 1일에 중국국민당에서는 총리 손선생을 장사지내고 비를 세운다'라는 의미 정도가 될 것입니다.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을 축출하고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국민당이 세운 이런 기념비를 남겨둔 것은 승자가 가지는 아량의 표현일 것입니다. 손문선생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말도 될 것이고요....... 

 

 

 비정(碑亭)을 나오면 앞으로 엄청난 계단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참배객들은 이 계단때문에 숨이 막히는 모양입니다. 

 

 

  지레 겁을 먹을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계단 높이가 낮아서 부담없이 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민주의를 제창한 손문은 1925년에 북경에서 돌아가셨습니다. 1925년이라면 당시의 집권세력은 국민당이었기에 국민당정부가 주관하여 1926년부터 남경에 묘역을 조성하기 시작해 1929년 6월 1일에 봉안의식을 가짐으로서 완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건물 지붕에는 푸른 기와를 얹었습니다. 중화민국의 깃발이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이므로 국기를 이루는 색깔을 잘 음미해보면 어떤 뜻으로 이 묘역을 조성했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계단을 걸어올라갑니다.

 

 

내 앞에는 중국인 젊은이 한쌍이 걸어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존경할만한 국부(國父)를 가진 나라의 백성들은 정신적으로나마 약간은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다보면 멋진 경치를 볼 수 있습니다.

 

 

겹쳐진 산등성이너머로 나타나는 남경시내의 풍경이 장관을 이룹니다.

 

 

이제 드디어 다 올라왔습니다. 제당 건물 위에 달린  천지정기(天地正氣)라는 현판 글씨가 아래를 굽어다보고 있습니다. '천지정기'라는 글씨는 손문선생의 친필로 알려져 있습니다.

 

 

손문이 묻혀있는 제당 건물입니다만 그대로 바로 진입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인들이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들이던가요?

 

 

나는 이제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을 아주 조금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것도 아홉번에 걸친 중국배낭여행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무덤 바로 앞에서 일단 오른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정문으로 들어가되 측면에서 들어오라는 말이지요.

 

 

나는 오른쪽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제당 양쪽으로는 오벨리스크를 닮은 돌기둥 두개가 대칭점에 서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나 해가 뜨거운 날에는 이런 통로가 위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통로를 따라 걸은 후 다시 제당(際堂)앞으로 다가갑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요.

 

 

제당 건물 위에는 민족, 민생, 민권으로 이루어지는 삼민주의의 핵심사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글씨를 쓴 이는 국민당 원로였던 장정강이라는 분이라고 합니다.

 

 

제당안의 사진촬영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습니다. 한가운데는 프랑스 조각가인 폴 랜도우스키(Paul Randowsky)의 작품인 손문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관람객이 줄지어 들어오기에 제당안을 천천히 살펴보기는 어려웠습니다.

 

 

떠밀리다시피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밖에서 다시 한번 안을 살펴보았습니다. 손문의 모습을 사진찍어두려면 그 수밖에 없었습니다.  

 

 

손문의 상은 한백옥(漢白玉)이라는 돌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백옥이 중국 북경부근에서 생산되는 고급 옥돌인지 아니면 이탈리아같은데서 수입한 최고급대리석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죽고난 뒤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인생을 잘살았다는 말이 되겠지요.

 

 

내려오는 길에는 기어이 진눈깨비가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지방에서는 눈이 내려서 쌓이기보다 진눈깨비가 날리는 경우가 더 많을듯 합니다.

 

 

미끄러지면 곤란하니까 살살 걷습니다.

 

 

광장까지 내려온 우리들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명효릉을 가봐야되기 때문입니다.

 

 

중산릉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정문을 통과해서 나왔습니다.

 

 

부근에는 상가건물들이 늘어서 있더군요.

 

 

으스스하게 추워오길래 커피가게를 찾았습니다.

 

 

찻집을 발견하고는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층에서 커피를 팔더군요.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그렇고 그런 커피가 나왔습니다. 

 

 

 커피문화는 역시 우리나라가 몇 수 위인것 같습니다.

 

 

2층 창가에 앉아서 따끈한 커피를 마시며 몸을 녹였습니다. 진눈깨비가 아까보다 더 심하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묘한 인물을 찾았습니다. 사진틀 속의 저 양반이 도대체 누구며 어디에서 보았던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