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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5 중국-붉은기의 흔적:강소,호남(完)

오자서 2

by 깜쌤 2015. 7. 28.

 

<성루부근 성벽에서 아래를 흐르는 물길로 통하는 계단길>

 

오왕 요 12년에 초나라의 평왕이 죽었고 뒤를 이어 진나라 출신의 공주가 나은 아들 진()이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초의 소왕(昭王)입니다. 오왕 요는 초나라의 국상을 기회로 여겨 자기의 두 아우들인 개여(蓋餘)와 촉용(燭庸)을 시켜 초나라를 기습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초나라의 계략에 말려 두 공자는 고립되고 맙니다. 오나라가 텅비다시피 되자 공자 광은 이를 좋은 기회로 여겨 전저를 시켜 오왕 요를 암살하도록 권했습니다.

 

"이 시기를 잃어서는 안되겠다. 구하지 않고서야 무엇을 얻을 수 있으랴? 나야말로 이 나라의 진정한 후계자이니 스스로 서는 것이 옳은 일이다. 아우들이 돌아오더라도 다른 말은 없을 것이다."

 

공자 광의 말에 전저가 대답했습니다. 

 

"왕 요를 죽일 때가 왔습니다. 그 어머니는 늙었고 아들은 어리며 두 동생은 초나라에 고립되어 있으니 이 기회를 놓치면 곤란할 것입니다."

 

이에 공자 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나의 몸이 그대의 몸이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오문교의 모습>

 

오왕 요 12년 4월 병자일에 광은 무장한 병사들을 지하실에 숨기고 술을 준비해둔 다음, 오왕 요를 초대하였습니다. 오왕 요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어서 연도에 경호병을 늘어세우고 궁전을 나와서 공자 광의 집으로 갔습니다. 

 

문과 계단 좌우로 왕의 심복들이 서고 모두들 자루가 긴 칼을 잡고 왕을 경호했습니다. 주연이 한창 무르익었을때 공자 광은 일부러 발이 아픈척하고는 연회장을 나와 지하실로 가서 전저에게 명하여 뱃속에 비수를 감춘 구운 생선을 가지고 올라가 왕에게 권하도록 했습니다.

 

왕앞에 나아간 전저는 고기를 찢고 구운 생선 속에 숨겨둔 비수를 가지고 왕 를 찌르니 왕은 그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전저도 좌우에 서있던 왕의 호위병에게 붙들려 현장에서 처단당하고 맙니다.

 

왕의 수행자들이 동요하는 틈을 타서 지하실에 숨어있던 공자 광의 부하들이 올라와 오왕 요의 일행들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오왕 합려입니다. 합려는 오왕 부차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죠. 부차의 원수는 월나라의 구천이 되는 식입니다.

 

 

 

 

<오문교 끝에서 성벽으로 이어지는 계단과 물길>

 

왕위에 오른 합려는 전저의 아들을 상경(上卿)으로 삼아 나름대로 은혜를 갚았습니다. 그리고는 오자서를 불러들여 외교고문격인 행인(行人)에 임명한 것이죠. 오자서는 비로소 초나라에 복수할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오왕 요의 명령을 받아 초나라에 쳐들어갔던 두 공자 개여와 촉용은 합려가 요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 초나라에 항복했고 초나라에서는 그들을 ()라는 지방에 살게 했습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초나라에서는 대신 백주리각완이 피살되는 정변이 발생했는데 백주리의 손자인 백비()가 망명해오자 합려는 그를 대부에 임명해두었습니다. 합려가 왕이 된지 3년째 되던해 오자서와 백비를 데리고 서를 쳐서 두 공자를 사로잡은뒤 여세를 몰아 초나라의 서울인 까지 쳐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이때 장군 손무(孫武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인물)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제지하였기에 군사를 돌려 회군하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도 몇차례 더 초나라와 자잘한 전쟁을 하던 오나라에서는 합려9년에 군사를 일으켜 같은 소국과 연합전선을 편 끝에 마침내 초나라의 수도인 영을 포위할 수 있었습니다.    

 

 

 

<수륙고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루>

 

포위전은 성공을 거두어 오나라의 군대가 영에 입성했고 초나라 소왕은 간신히 탈출해서 작은 나라를 전전하다가 수()나라로 도망을 갔으나 끝내 포위를 당합니다. 소왕을 넘기라는 오나라 군대의 요구에 시달리던 수나라 사람들은 점을 쳐 본 결과 소왕을 넘기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오자서가 초나라에 있을때 친하게 지냈던 인물 가운데 신포서(申包胥)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자서가 망명길에 오르면서 신포서에게 이르기를 "나는 기어코 초나라를 뒤엎고 말테다."고 맹세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신포서는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지키고 말테다"하고 응수를 했습니다.

 

오자서가 영을 함락시킨 뒤 소왕을 찾다가 잡지 못하자 소왕의 아버지인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에 삼백번이나 매질을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를 전해들은 신포서는 오자서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복수는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내가 듣기에 '사람의 수가 많으면 한때는 하늘을 이길 수가 있지만, 하늘이 한번 결정을 내리게 되면 능히 사람을 깨뜨리게 된다'고 하였소. 그대는 원래 평왕의 신하로서 그를 섬기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평왕의 시체를 욕보였으니 이보다 더 하늘의 이치에 거스리는 일이 어디 있겠소?"

 

이에 대해 오자서는 유명한 말로 대답을 했습니다.

 

"부디 신포서에게 잘 전해라. '해는 지고 길은 멀기에 갈팡질팡 걸어가며 앞뒤를 분간할 겨를이 없었다'고....."

 

그렇게 해서 생긴 고사성어가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는 낱말입니다.  

 

 

 

<누각 속에 진열된 장군복>

 

그런 신포서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중원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르던 진()나라로 달려가 구원병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진나라가 들으려 하지 않자 신포서는 진나라 대궐 앞 뜰에서 칠일동안이나 밤낮으로 울었습니다. 이를 가련하게 여긴 진나라왕 애공은 전차 5백승()을 보냈는데 그들이 오나라 군대와 싸워서 승리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때마침 전쟁터를 이탈하여 먼저 귀국했던 오왕 합려의 동생 부개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합려는 군대를 돌이켜 돌아가서 부개를 쳤습니다. 형제간의 싸움에 패한 부개는 초나라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덕분에 초 소왕은 귀국할 수 있었고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 합려는 태자인 부차에게 군사를 주어 초나라를 치게 했고 부차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바람에 초나라는 수도를 에서 으로 옮기게 됩니다. 오자서와 손무의 계첵에 의해 오나라는 사방의 여러 나라를 굴복시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공자나라의 재상이 된 것도 이 시기의 일입니다.

 

합려 19년, 합려는 월왕 구천과의 싸움에 나갔다가 손가락 부상을 입게 되는데 상처가 도지면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합려는 태자 부차를 불러 유언을 남겼습니다.

 

"너는 구천이 이 애비를 죽인 것을 잊을 수 있겠느냐?"

 

당연히 부차는 감히 잊을 수 없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합려가 죽었습니다.      

    

 

 

 

<소주 성벽에서 밑으로 내려가는 경사로>

 

왕이 된 부차는 백비를 태재(太宰)로 임명하고 군사력을 길러 2년 뒤에 월나라를 쳐서 부초산에서 대승리를 거둡니다. 패잔병 5천을 거느리고 회계산 꼭대기에 머물러있던 월왕 구천은 대부 문종(文種)을 시켜 백비에게 후한 뇌물을 주고 강화를 요청했습니다. 오왕 부차가 이런 제안을 받아주려하자 오자서가 제지했습니다.

 

"월왕 구천을 고통을 잘 견디는 자이니만큼 지금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로 인해 후회하게 되옵니다."

 

부차는 오자서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백비의 의견을 받아들여 월나라와 강화를 했습니다.

 

 

 

 

<소주 성벽 아래에 자리잡은 오자서를 기리는 사당 - 오상사>

 

월나라와 강화한 5년 뒤 제나라의 경공이 죽고 대신들이 세력다툼을 하느라 나라가 어지러워져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차는 제나라를 치려했습니다. 이때 오자서가 나서서 말렸습니다.

 

"구천은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백성 중에서 초상을 만난 자나 병든 자는 반드시 찾아가 위문하며 훗날에 그들을 쓸 방책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구천이 살아있는 한 반드시 오나라의 걱정이 돌 것입니다. 마치 사람의 뱃속에 병이 들어있는 것과 같은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월나라를 먼저 치시지 아니하고 제나라를 치려하심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이 말에서 심복지환(心腹之患)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난 것이죠. 그러나 오왕은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제나라 정벌에 나섰으며 애릉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습니다. 그 이후로 부차는 오자서를 점점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오자서를 모신 사당인 오상사 입구와 안쪽의 모습>

 

다시 4년뒤 오왕 부차는 다시 제나라 정벌에 나섭니다. 이때도 월왕 구천은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의 계책을 받아들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나라를 도움과 동시에 태재(太宰) 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바쳐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습니다. 백비는 그 전에도 월나라에서 보내오는 많은 뇌물을 받고 있었던지라 오왕 부차에게 항상 좋은 말로 월나라를 두둔했습니다. 부차가 월나라에 대한 경계심을 풀게되자 오자서가 나서서 다시 한번 더 간곡하게 권했습니다. 

 

"월나라는 오나라에게 있어서 심복지환(心腹之患)과 같습니다. 지금 왕께서는 월나라의 아부에 찬 말을 믿고 제나라를 치려하시지만 그 땅은 자갈밭과 같은 것이어서 차지한들 소용이 없는 곳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옳고 그른 것을 거꾸로 하고 조심하지 않는 사람은, 가벼우면 코를 베는 형을 주고 무거우면 죽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잘 지킨 상(=은)나라가 번영을 하게 된 것은 온 천하가 아는 일이옵니다. 부디 왕께서는 월나라를 먼저 치도록 하십시오."

 

 

 

<오상사 내부 뜰>

 

물론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였고 거꾸로 오자서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오자서는 떠나기에 앞서 아들에게 일렀습니다.

 

"나는 자주 왕에게 간해보았으나 왕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머지않아 오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지만 너까지도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아들을 함께 데리고 가서 제나라의 포목(鮑牧)이라는 사람에게 부탁을 해두고 돌아와서는 정세를 살폈습니다. 오자서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백비는 오왕 부차에게 이렇게 중상을 했습니다.

 

 

 

 

<오상사의 내부>

 

 

"자서라는 사람은 강포하고 인정이 없어서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가득한 자입니다. 그는 왕께 대해서도 앙심을 먹고 있는바 틀림없이 큰 화근이 될 것입니다. 얼마전에 왕께서 제나라를 치려했을때 반대를 했던 오자서는 왕께서 승리를 하고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왕을 원망했습니다. 이제 왕께서 다시 제나라를 치려하시면 오자서는 핑계를 대고 따라 가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제가 사람을 시켜 알아본 바에 의하면 자서는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을때 아들을 포씨에게 맡겨두고 왔다고 합니다. 왕께서는 일찌감치 오자서에 대해 대비를 하셔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오왕 부차는 "경이 말하지 않아도 나 역시 의심을 하고 있었소"라고 말하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다음 글에서 나머지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