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배낭여행기/15 중국-붉은기의 흔적:강소,호남(完)

오자서 1

by 깜쌤 2015. 7. 27.

 

<고운하(古運河) 위에 걸린 오문교(吳門橋)의 모습>

 

'홍콩 느와르'의 맛은 비장미(悲壯美)에 있습니다. 장국영, 주윤발같은 배우들이 등장하여 사나이들의 우정을 과시했던 그런 영화들 속엔 폭력과 허무, 그리고 죽음이 난무했습니다. 그런 것과 딱 들어맞는 경우는 아니지만 지금부터 약 2500여년전의 중국에 비장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나이가 등장하여 누가봐도 애통하다싶은 비장(悲壯)한 스토리를 남기고 죽어갔습니다.  

 

 

<오문과 소주성벽인근의 공터>

 

그가 바로 오운(伍員)입니다. 본명보다 자(字)가 더 널리 알려져있는데 우리가 흔히 오자서(伍子胥)라고 부르는 인물이 바로 오운입니다. 오자서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현장에 왔으니 오늘은 그의 파란 만장한 인생살이를 짚어볼까 합니다. 최인욱, 김형수 두분이 번역한 사마천의 <사기열전1>안에서 오자서열전 자객열전을 근거로 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보겠습니다.   

 

 

 

위 지도의 출처는 아래와 같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중국의 바이두입니다.

 

 

오자서가 주로 활동했던 나라는 초와 오입니다. 초나라의 수도 과 오나라의 수도 고소(오늘날의 소주) 빨간색 점으로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오와 원수지간이 되는 월나라의 수도 회계(오늘날의 소흥)는 녹색 점으로 표시를 했고 송나라의 수도였던 상구는 검은색 점으로, 진()의 수도였던 함양은 파란색 점으로 그 위치를 나타내두었습니다. 

 

 

<배가 출입할 수 있었던 성문>

 

오자서는 초나라 사람입니다. 이름은 ()입니다. 운이라고 쓴 한자는 원()자와 같으나 이름을 나타낼때는 운으로 발음을 했기에 이 글에서도 당연히 운으로 표기했습니다. 아버지는 오사, 형은 오상이었으며, 조상 중에 오거라는 분이 있었는데 초나라 임금 장왕을 섬기며 바른 말을 잘한 인물로 세상에 알려져 오자서의 집안은 초나라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초평왕의 아들로서 ()이라는 이름을 가진 태자가 있었습니다. 평왕은 오운의 아버지 오사를 태자를 가르치는 태부(太傅)로, 비무기라는 인물을 소부(小傅)로 임명했습니다. 비무기는 불성실하다는 평을 받고 있던 그렇고 그런 정도의 인물이었는데 어느 때 평왕으로부터 진나라 공주를 태자비로 맞이하기 위해 진나라로 다녀오라는 임무를 띄고 길을 떠났습니다. 

 

 

 

 

<오문교밑을 흐르는 고운하로 지나가는 유람선>

 

그런데 진나라 공주가 굉장한 미인인 것을 알고는 말을 달려 급히 돌아와서 평왕에게 진나라 공주를 임금이 직접 취하고 아들 건에게는 다른 여자를 골라주는 것이 좋겠다는 진언을 하게 됩니다. 물론 자기 출세를 위한 것이었지요. 비무기의 말에 판단력을 잃어버린 평왕은 진나라 공주를 맞아들여 총애를 하였고 그 둘 사이에서 아들 ()이 태어납니다. 이 일로 인해 비무기는 평왕을 직접 모시게 되어 정치일선에 나서게 되는 것이죠.

 

비무기같은 간사한 인간도 훗날의 일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인지라 평왕이 죽고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자기생명 부지를 위해 왕에게 태자 건을 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태자 건의 어머니는 채나라 사람이었고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여자였기에 평왕은 태자를 차츰 멀리 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국경지대 마을인 성보의 태수로 내보냈습니다. 

 

 

 

 

<오문교 밑을 지나는 유람선>

 

그정도에도 안심하지 못한 비무기는 태자가 제후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평왕에게 끊임없이 참소하여 마침내는 태자를 가르치는 태부의 직책에 있던 오사를 불러들여 사실을 캐묻도록 만들었습니다. 오사는 비무기의 인간 됨됨이와 태자 건에 대한 참소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평왕에게 비무기를 멀리 하라고 간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비무기도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자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며 왕은 포로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기에 평왕은 이성을 잃고 오사를 옥에 가두고는 성보의 사마(司馬 군정관에 해당함)였던 분양으로 하여금 태자를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주어 성보로 내려보냈습니다.

 

 

 

<소주고성에는 육지에서 들어오는 성문과 운하에서 직접 들어올 수있는 성문이 같이 있습니다>

 

사마 분양은 태자에게 사람을 미리보내 도망하라고 알려주었고 태자 건은 송나라로 도망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태자를 쫒아내는데 성공한 비무기는 오사 일가족을 지목하여 제거작업에 나서게 됩니다. 오사의 두 아들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비무기의 계책을 받아들인 평왕은 감옥에 가두어둔 오사에게 두 아들을 불러 들이면 오사의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이에 오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큰 아들 ()은 속이 깊으니 부르면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지만 은 마음이 굳세어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욕을 참고 견디는 성격이라 반드시 큰일을 이룰 것입니다. 여기로 오면 붙잡혀 죽는다는 것을 알것이니 그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성벽위에서 도르레를 이용하여 밑으로 철문을 내릴 수 있도록 장치를 해두었습니다

 

 왕은 사람을 보내 두 아들이 오지 않으면 아버지가 죽을 것이라고 알리게 했습니다. 형 오상이 가려하자 오운은 말렸습니다. 

 

"초나라에서 우리 형제를 부르는 것은 우리 아버지를 살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떠남으로 인해 생길 후환이 두려워 우리를 잡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를 인질로 잡은 상황에서 우리가 가는 날이면 부자가 모두 죽게 될 것입니다. 차라리 다른 나라로 달아나 후일을 도모함이 낫습니다. 부자가 함께 죽는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나도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우리를 불러 도움을 얻으려하시는데도 가지 않고, 그렇다고 뒷날 원수도 갚지 못하게 된다면 결국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나는 그것이 싫다. 너는 달아나라. 그리하여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아다오. 나는 가서 죽겠다."

  

 

 

 

<도르레 시설과 소주성내의 모습>

 

오상이 자진해서 갇히고나자 이번에는 다른 사자가 와서 운을 잡으려했습니다. 그러나 오운이 화살을 겨누고 있었으므로 선뜻 달려들지 못하는 틈을 타 오운은 결사적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오자서(=오운)는 태자 건이 송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가서 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아들 오운이 도망갔다는 말을 전해들은 아버지 오사는 깊이 탄식을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초나라는 이 일로 인해 깊은 고통을 받음과 동시에 전쟁을 겪게 될 것이다."

 

자진출두한 오운이 서울로 압송되어 오자 평왕은 부자를 함께 처형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자서가 송나라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송나라에 '화씨의 난'이 일어나게 되자 오자서는 태자 건과 함께 정나라로 도망칩니다. 

 

정나라 사람들이 태자 건을 환대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나라가 작은 것에 실망한 건은 진()나라로 떠나갑니다. 이 진()나라는 태자 건의 비가 될뻔했던 진()나라 공주의 출신국인 과는 다른 나라입니다.    

 

 

 

 

<소주 성벽 아래 빈터의 모습>

 

진() 임금 경공(頃公)은 태자 건에게 한가지 제안을 해왔습니다.

 

"태자는 정나라와 친한 사이이니 그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줄로 알고 있소. 그러니 태자가 우리 진나라를 위해 안에서 내응을 해주면 우리가 공격할 경우 쉽게 정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지 않겠소? 그런 뒤에는 태자가 그 나라를 직접 다스리면 어떻겠소?"

 

이 말에 욕심이 생긴 태자 건은 경공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시 정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어떤 일로 인해 모시고 있던 종자를 죽이려했더니 이 종자가 정나라 관리들에게 가서 자기가 알고있던 비밀을 모두 고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한 정나라에서는 재상인 자산(子産)에게 명해 태자 건을 잡아 주살해버리고 맙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오자서는 건의 아들 ()을 데리고 오나라로 달아났습니다. 국경인 소관에서 관문을 지키는 관리에게 쫒기게 된 오자서는 태자 건의 아들인 승과 헤어져 혼자 도망치게됩니다. 추격자들에게 쫒기던 오자서는 양자강에 이르러 때마침 배를 띄우고 있던 한 어부의 도움을 받아 위험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성벽 밑 너른 공터>

 

강을 건넘으로서 목숨을 살린 오자서는 칼을 끌러 어부에게 사례로 드리고자 했습니다.

 

"이 칼은 백() 금의 가치가 있는 칼입니다. 이 칼을 당신에게 사례로 드리고자 합니다."

 

그랬더니 어부가 하는 말이 그를 놀라게 하고 맙니다.

 

" 지금 초나라에서는 이런 방이 나붙어 있소이다. 오자서를 잡는 사람에서는 조(곡식의 종류) 5만 섬과 집규(執珪 초나라 최고의 작위로서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을 잡는 역할도 맡음)의 벼슬을 준다고 말이오. 만일 내가 욕심이 있었으면 그런 칼 하나가 문제겠소?"

 

오나라에 들어선 오자서는 수도인 (오늘날의 소주)로 가는 도중 병에 걸리기도 하고 돈까지 떨어져 걸식을 해야하는 비참한 처지에 몰리고 맙니다. 당시 오나라 왕은 ()였고 병권을 잡은 장군은 공자 ()이었습니다.  어찌어찌해서 오자서는 공자 광을 통해 오왕 요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문교와 늘어진 버들>

 

그 후 초나라와 오나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합니다. 초나라 국경마을인 종리와 오나라 국경지대의 비량지의 사람들은 함께 누에를 치고 있었는데 양쪽 여자들의 뽕때문에 다툼이 일어난 사건이 점차 확대되어 두나라 사이에 전쟁까지 벌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나라 장군 광은 출병하여 종리오소 두 고을을 함락시킨 뒤 돌아왔습니다. 이 무렵 오자서가 오왕 요에게 권했습니다. 

 

"초나라와 싸워 이길 수 있으니 공자 광을 다시 보내도록 하십시오."

 

 

 

그러자 공자 광이 반대했습니다. 

 

"저 오자서라는 사람은 아버지와 형이 초나라에서 피살되었습니다. 그가 왕께 초나라 치기를 권하는 것은 자기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오나라가 초나라를 친다고 해도 아직은 이긴다고 볼 수 없습니다."

 

눈치빠른 오자서는 그 말을 듣고 비로소 공자 광의 속셈을 깨달았습니다. 공자 광은 왕을 죽이고 임금자리에 앉고 싶어하기 때문에 지금은 외부의 일을 말해보아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죠.

 

오자서는 전저(專諸 이럴 때는 전제가 아니고 전저라고 읽음)라는 인물을 공자 광에게 소개해주고는 다시 만난 태자 건의 아들 승과 함께 들판에서 농사를 지으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로부터 5년 뒤에 초나라 평왕이 죽었습니다.

 

 

 

<운하와 이어진 성루 밑의 물길>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으므로 다음 글에 이어가겠습니다.

 

 

 

 

 

 

어리

버리

 

 

 

 

 

 

 

'배낭여행기 > 15 중국-붉은기의 흔적:강소,호남(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자서 3  (0) 2015.07.29
오자서 2  (0) 2015.07.28
옛 소주성에 올랐습니다  (0) 2015.07.23
소주의 또다른 명물 - 반문경구  (0) 2015.07.22
중국에도 '피사의 사탑'이?  (0) 2015.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