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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5 중국-붉은기의 흔적:강소,호남(完)

졸정원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2

by 깜쌤 2015. 7. 14.

 

졸정원에는 유난히 물이 풍부합니다. 소주가 물의 도시라고는 해도 정원 안 곳곳에 물길이 오밀조밀하게 엮어져있다는 것은 기본 설계를 할때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말이 됩니다.

 

 

졸정원이라는 말을 두고 여러가지 해석이 분분합니다. 어떤 이는 졸정(拙政)이라는 말이 ‘졸자지위정야(拙者之爲政也)’라는 말에서 따왔다고 하면서 좋은 정치를 하려면 스스로를 낮춰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을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어리석은 자가 정치를 하는 세태를 비꼬았다고 하는데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후자의 해석이 맞다면 의도적이었든지 아니든간에 졸정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을 볼때 첫주인도 간덩어리 하나는 제법 컸던 모양입니다.

 

 

확실히 소주는 물의 도시이며 정원의 도시입니다.

 

 

당나라 시대때 이 집은 육구몽(陸龜蒙)의 저택이었다고 합니다. 육구몽은 당나라 말기의 시인으로서 서기 881년에 죽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여기에 은거하여 밭을 갈고 차밭을 가꾸었다고 전해집니다. 은둔생활을 했었다는 말이겠지요.

 

 

원나라때는 졸정원 터가 대굉사라는 절로 변했다고 합니다.

 

 

진순신이 쓴 책 <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기행>을 보면 1,500년대 전반에 왕경지(王敬之)가 이 정원에 졸정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보통은 왕헌신이라는 사람이 졸정원을 만들었고 이름까지 붙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요? 나는 중국 바이두 백과사전에 접속해서 사실을 확인해보았습니다. 바이두 백과서전에는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었습니다. 

 

 

출처 : http://baike.baidu.com/link?url=NnnVQ7h8_oRoeOK_zIQjxwh3MJx-QMozoLlJppTr8_0ax7Cmyuv8mFfGd3ejoF6RYYsOVgNuI89u2pCadKOo4_

 

明正德初年(16世纪初),因官场失意而还乡的御史
王献臣, 以大弘寺址拓建为园,取晋代潘岳《闲居赋》中“灌园鬻蔬,以供朝夕之膳……此亦拙者之为政也”意,名为“拙政园”。中亘积水,浚治成池,弥漫处“望若湖泊”。园多隙地,缀为花圃、竹丛、果园、桃林,建筑物则稀疏错落,共有堂、楼、亭、轩等三十一景,形成一个以水为主、疏朗平淡,近乎自然风景的园林,“广袤二百余亩,茂树曲池,胜甲吴下”。嘉靖十二年(1533),文徵明依园中景物绘图三十一幅,各系以诗,并作《王氏拙政园记》。

 

 

바이두 백과사전에는 어사벼슬을 지낸 왕헌신이라는 이름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가 졸정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했습니다. 나는 왕헌신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다시 바이두 사전에 접속해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래와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王献臣

 

王献臣,字敬止,号槐雨。祖先吴人,隶籍锦衣卫。明弘治六年(1493)中进士,授职行人,又升迁为御史。但他仕途并不顺利,曾两次被东厂缉事者诬陷。一次被拘禁于监狱,杖三十,谪上杭丞。后一次在弘治十七年(1504),被谪广东驿丞。正德元年(1506),迁任永嘉知县。后罢官家居。
当时王献臣刚四十余岁,正当壮年。回乡之后,他以宁真道观废址及大弘寺址造拙政园。从此逍遥自得,享闲居之乐。
王献臣活到67岁之后,73岁之前,即嘉靖十八年至二十四年之间,约70岁左右。他死后,其子一夜豪赌,将名园输于徐氏,孙以吊丧为业

 

 

 

 

 

왕헌신의 자()가 경지라는 사실이 밝혀져 있으니 이제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본명이 헌신이요 자가 경지였습니다. 그러니 왕헌신이나 왕경지는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죠. 그의 아들이 도박으로 이 정원을 넘긴 사실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정원 안에 있는 필가당 건물에서 태평천국의 난때 핵심인물이었던 이수성이 집무를 했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이 여유롭게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명나라시대때 왕징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졸정원을 두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나름대로 졸정원 안 서른 한곳을 골라 화폭에 옮긴 그림이 '졸정원도'라고 합니다.

 

 

이 건물은 배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연못에 띄운 배모양을 상상하며 만든 건물이라고 전해집니다.

 

 

통로는 이리저리 휘어지고 각이 져있습니다. 중국인들 특유의 미적인 감각이겠지요.

 

 

청나라때 대희(戴熙)라는 이름을 가진 화가가 문징명의 그림을 압축하여 한폭으로 그렸는데 그 모습이 현재의 졸정원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그화려했던 소주의 명성도 이제는 인근의 거대도시인 상해에게 아낌없이 넘겨주고 말았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냥 넘겨주었다기보다는 빼앗겼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지요.

 

 

하지만 소즈의 명성도 그리 녹녹치 않습니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왜 생겨났겠습니까? 

 

 

천하사람들에게 소주의 명성은 아직도 자자하고 평판도 좋습니다.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정도를 봐도 아직 소주는 죽은게 아닙니다.

 

 

나는 통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화창을 통해 드러나는 멋진 경치를 한번씩 살펴가며 걸었습니다.

 

 

다양한 모양의 창문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나는 출구를 찾아가며 걸었습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보니 길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 것이죠.

 

 

화창사이를 뚫고 들어온 대나무 이파리들이 정겨움을 선사해줍니다. 

 

 

저 담쟁이들은 어디서부터 뻗어나간 것일까요?

 

 

그 비밀은 안쪽에 숨어있었습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각기 다른 경치를 선물해주니 졸정원의 명성은 그래서 하늘을 찌르는가봅니다.

 

 

통로를 따라 걷다가 분재원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매화를 발견하고는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그렇다면 들어가봐야지요.

 

 

분재라고는해도 제법 큰 덩치를 자랑하는 것도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재원을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나도 분재에는 관심이 있는 사람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의 기후라면 분재를 위해 비닐하우스나 유리온실을 만들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이 만들어내는 분재만큼 아기자기함과 오밀조밀한 맛은 없지만 대신 중국분재에는 호쾌함이 감추어져 있는것 같습니다.

 

 

모과나무 같기도 합니다.

 

 

 분재원바닥을 장식한 돌모자이크도 화려하기만 합니다.

 

 

이런나무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어왔을 것입니다.

 

 

나는 다음 구역으로 가보았습니다.

 

 

둥근 문을 들어설때면 여기가 중국이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분에 난을 그려 넣었네요. 난과 분재! 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수종들도 제법 다양했습니다.

 

 

중국인들도 소나무분재를 좋아하는듯 합니다.

 

 

분재원 한모퉁이에 멋진 가게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장소는 커피집이나 찻집이 더 어울릴텐데 말이죠. 안으로 슬며시 들어가보았습니다.

 

 

멋진 서화들과 자수품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확실히 소주의 자수는 명품으로 인정받을만 합니다.

오죽하면 소수(蘇繡)라는 말이 생겼을까요?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