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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5 중국-붉은기의 흔적:강소,호남(完)

소주박물관과 충왕 이수성

by 깜쌤 2015. 7. 9.

 

흑과 백, 선과 악, 양과 음, 빛과 어둠, 남과 여.....  세상에는 기묘한 대칭을 이루는 많은 짝들이 있습니다.

 

 

소주박물관에는 흑과 백, 그리고 물과 돌이 섞여 환상적인 조합을 이루어냈습니다.

 

 

순전히 제 느낌이긴 하지만 나는 이 박물관 건물에서 한없는 단아함을 느꼈습니다.

 

 

단순함 속에 정갈함과 같은 덕목이 스며들어 있는 삶을 살고자 했지만 그렇게 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동안 제가 추구해왔던 삶과도 어딘가 닮은듯 합니다.  

 

 

건물 외관에 날카로운 직선만 존재한다면 거칠고 날카롭고 투박한 느낌이 날 터이지만 여백의 미를 살리고자 하여 충분히 확보한 공간에 물을 담아서 중화시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박물관과 물은 서로 적이 아니던가요? 소장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는 습기와 불길과 도난을 피하는게 최우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나는 한참을 살폈습니다. 오늘따라 하늘도 흐려서 온 세상이 무채색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페이는 대나무를 박물관 속으로 끌여들인듯 합니다. 중국인들이 추구하는 이상세계와 대나무가 가진 이미지는 어딘지 모르게 잘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던가요? 

 

 

나는 물길 한가운데로 난 길을 걸어서 출구쪽으로 향했습니다.

 

 

이오밍 페이(Ieoh Ming Pei)가 추구해왔던 이상세계가 내 눈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강소성과 안휘성을 포함하는 강남인들의 건축문화 진수는 휘파건축일테고 그런 개념을 멋지게 살린 이상세계가 소주박물관일 것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몇년간 강소성과 절강성, 복건성을 대강이나마 훑어보았던 것이 강남문화를 이해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강서성과 호남성의 분위기는 동남부 강남지방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소주와 항주를 중심으로 하는 오와 월나라 문화의 흐름을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나에게는 크나큰 행운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빠뜨린 부분은 산서성과 호북성 귀주성 정도일 것 같습니다. 중국행정구역 하나하나를 탐방해나가는 이 놀라운 재미를 더 많이 느껴보고 싶습니다만 이제는 세월의 흐름이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정도 둘러보았으니 이제는 휴게실로 가야지요.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싶었지만 손님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포기하고 출구를 통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냥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리면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됩니다.

 

 

바로 옆에 태평천국의 이 일어났을때 지도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충왕 이수성의 거처가 소주박물관과 바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나는 이수성의 거처를 유심히 찾았습니다.  

 

 

이수성! 1851년에 발생했던 '태평천국의 난' 당시 충왕(忠王)이라는 직함으로 태평천국군에 의해 천경(天京)이라고 불리었던 남경을 사수하는데 목숨을 걸었던 인물입니다. 

  

 

나는 지금 이수성이 소주에 머물렀을때 그가 거처로 사용했던 현장에 와있는 것이죠.

 

 

이수성은 중국 남부 출신입니다. 오늘날의 향항(=홍콩)이나 광주인근 지역 사람이라고 여겨도 될 것입니다. 광주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 최남부지방은 일찍부터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던 곳이어서 상대적으로 개화가 빨리 된 곳이었습니다. 홍콩을 우리식 한자발음 그대로 썼더니 내가 무척이나 고리타분한듯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홍수전도 중국남동부 해안지방 출신입니다. 홍수전이 기독교사상에 젖어든 것 까지는 문제가 없었으나 그 이후가 문제였습니다. 태평천국의 난을 종교적인 견지에서 보느냐 아니면 농민운동의 발로로 보느냐에 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존재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태평천국의 난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어찌보면 홍수전은 이상주의자였습니다. 다만 그 사상적 배경을 기독교에서 찾았다고 하는 것이 특이점이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그가 한 행실을 보면 진정한 크리스찬의 행동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홍수전 밑에서 충왕(忠王)의 자리를 맡아 충성을 다한 사람이 이수성입니다.

 

 

이수성은 천경(=오늘날의 남경, 태평천국의 수도)이 함락될때 홍수전의 아들을 데리고 탈출했으나 결국에는 붙들려 처형당하고 맙니다.

 

 

이수성의 거처안에는 예배당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그들의 사상적인 배경이 약간은 이해될듯도 합니다.

 

 

태평천국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추구했던 것은 계급과 차별이 없는 평등사회였습니다만 그런 고상한 이념을 그대로 실천하기란 너무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앞서야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역사적인 교훈에서 우러나온 현명한 정책의 신중한 집행일 것입니다만 그렇게 하기에는 그들의 지식수준과 역량이 한참 모자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태평천국의 난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서양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인한 청나라의 몰락이 가속화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지금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공산당도 이미 벌써 현실과 이념 사이에 깊은 모순을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중화인민공화국 체제도 언젠가는 내부모순으로 인한 갈등으로 곤란한 상황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다만 그 시기가 문제겠지요.

 

 

충왕부는 그냥 휙 둘러보고 돌아나가기에 너무 아까운 공간이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대륙을 지배한 이후 태평천국에 대한 평가는 반전을 이루었습니다. 한때는 나라를 어지럽게 만든 반란사건 정도로 치부되었습니다만 지금은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지요.

 

 

결국 이는 태평천국의 난을 이끈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길래 이런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겠지요.

 

 

태호석으로 치장을 한 저택의 정원은 아름다웠습니다.

 

 

여기서는 공연이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 문을 나서면 박물관 앞 거리가 될 것입니다.

 

 

곡방이라는 이름을 가진 공간에는 아직까지 잎이 덜 떨어진 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쪽에는 파초줄기가 버티고 있었고요......

 

 

가을에 찾아오면 더 아름다운 정취를 느낄 수 있지 싶습니다.

 

 

이제 마지막 공간입니다. 만고충의라는 글자 밑에 이수성의 흉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이수성을 반란군의 수괴라고 볼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부패하고 무능했던 만주족의 지배에 저항하여 과감하게 떨치고 일어난 민중지도자로 보겠지요.

 

 

무엇이 바른 시각이며 정확한 평가일까요?

 

 

충왕 이수성에 대한 평가를 숙제로 남기고 나는 다시 거리로 나왔습니다.

 

 

플라타너스가 줄지어 선 거리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한곳으로 몰려가고 있었습니다.

 

 

전통복장을 입은 이는 아마도 요지경장수인 것 같습니다. 밑에 받쳐입은 청바지가 왜 눈에 거슬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길에는 기념품 장수들의 매장이 줄을 이었습니다.

 

 

나는 늦게서야 눈치를 챘습니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저기가 바로 졸정원 입구일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