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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5 중국-붉은기의 흔적:강소,호남(完)

호구(虎丘)는 호구(虎口)가 아닙니다

by 깜쌤 2015. 7. 17.

 

중국 고대사에서 춘추시대에 당시까지 알려졌던 중국전체를 제패한 인물 다섯을 두고 춘추오패라고 말합니다. 보통 제나라의 환공, 진()의 문공, 초의 장왕(절영지연이라는 고사로 유명한 왕), 오왕 합려, 월왕 구천을 이르는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진()의 목공이나 송의 양공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오왕 합려와 지금 우리가 서있는 호구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호구에는 오왕 합려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호구를 한때는 해용산(海湧山)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호구(虎丘)라는 말은 호랑이가 나타난 언덕이라는 정도의 의미를 가집니다. 

 

 

춘추오패답게 오왕 합려는 검을 좋아했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합려의 무덤을 만들때 인부 약 10여만을 동원해서 축조를 했다는데 그의 무덤 속에 보검 3천여자루를 함께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명검을 워낙 좋아했던 합려인지라 보검을 손에 넣고 시험삼아 바위를 내려쳤는데 검은 이상이 없었는데 오히려 바위가 반으로 갈라졌다는 거짓말같은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바로 그사건이 있었던 현장이 여기라고 하는데.......  그래서 이 바위 이름을 시검석으로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시금석(試金石, touchstone)이라는 말의 어원이 시검석(試劍石)에서 온 것처럼 설명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글쎄요......  시금석은 금의 품질을 판단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광석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주로 검은 석영이나 치밀한 점판암의 일종인 나지흑석을 이용합니다. 검은 색 바둑알의 재료라고 보면 됩니다. 

 

 

시검석 위에는 당나라때 소주의 이름난 기생이었던 진양이라는 분을 기념하는 작은 정자가 있습니다.

 

 

중앙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따라 조금만 걸어오르면 오른쪽으로 널찍한 바위가 나타납니다. 양나라 시대 생공(실제 이름은 축도생 竺道生)이라는 고승이 천여명의 사람들을 앞에두고 불법을 베풀었다는데서 이름붙여진 것이 정설이지만, 어떤 이들은 합려의 무덤을 만들때 비밀유지를 위해 검을 묻었던 인부 천여명을 죽인 장소라는 식으로 풀이를 하기도 합니다.  

 

 

천인석이 있는 곳은 참으로 묘한 곳이어서 한쪽 모퉁이에는 수십명의 사람이 올라가서 앉을 수 있는 바위가 솟아있습니다. 저절로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사방을 깎아내었기에 그 부분만 남아있는 것인지는 장담을 하지 못하겠습니다만 눈길을 끄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바위에서 앞을 보면 호구검지(虎丘劒池)라는 네글자가 보입니다. 글자가 새겨진 바위 오른쪽 바로 옆에는 이선정(二仙亭)이라는 이름을 지닌 돌로 만든 정자가 서있습니다. 

 

 

 이선정 옆으로도 온갖 글자가 새겨진 바위들이 있습니다. 우리 눈으로 보면 자연 훼손도 이런 자연훼손이 없지만 중국인들 눈에는 그렇게 비치지 않는 모양입니다. 오른쪽의 초록색 전서는 생공강대(生公講臺)이고 왼쪽의 파란색 글자는 천인좌(千人坐)라는 글자입니다. 생공이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법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겠지요.

 

 

흔히 잘 하는 말로 하늘에서 신선 둘이 내려와서 바둑을 두었다는 곳이라고 해서 이선정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호구검지라는 멋진 글씨는 당나라때의 명필로 유명했던 안진경(顔眞卿)의 글씨라고 전합니다. 글씨체가 단아하기 그지없습니다. 호구검지라는 글씨 왼쪽엔 검지로 들어가는 둥근 석문이 있고 석문위에는 별유동천이라는 네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는 둥근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원동문을 들어서면 물이 들어찬 작은 웅덩이가 나타납니다. 웅덩이라고는 해도 품위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가 검지(劒池)입니다. 붉은색으로 쓴 검지라는 글씨는 왕희지의 필적(어떤 이들은 원나라의 주백기(周伯琦)가 쓴 글씨라고도 주장함)이라고 전해옵니다. 오른쪽에 파란색으로 새긴 풍학운천(風壑雲泉)은 미불의 글씨라고 합니다. 안진경, 왕희지, 미불같은 서예대가들의 글씨를 한곳에서 볼 수 있으니 호구를 명소로 인정할만 합니다.   

 

 

검지안에서 밖을 본 모습입니다. 동문밖으로 천인석이 보입니다.

 

 

나는 다시 둥근 문을 나와 운암사칠층탑이 있는 곳을 향해 걸었습니다. 올라가며 검지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싶었기에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아까는 저 밑에 보이는 문 부근에서 보았습니다만 이번은 검지를 가로지르는 다리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오왕 합려와 그의 아들 부차, 그리고 월왕 구천과의 물고 물리는 복수극을 뒤로하고 세월이 흐릅니다. 진시황 정이 천하를 통일한뒤 통일제국의 영토를 확인하고 천하를 순무하고자 남쪽으로 길을 떠나 여기까지 찾아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오합 합려가 명검을 묻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검에 욕심을 내어 합려의 무덤을 파헤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어느 정도 파들어가자 갑자기 어디선가 호랑이가 나타나 도굴현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그바람에 합려의 무덤을 파헤치려던 일은 갑작스럽게 끝이나고 맙니다. 그때 파낸 공사현장에 물이 들어차 검지라는 못이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검지를 가로지른 다리위에는 돌바닥에 두개의 구멍이 나있습니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 오왕 부차와 월나라 출신의 미녀 서시가 구멍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기도 하는 모양인데 전혀 시기적으로 앞뒤가 맞지않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차와 서시는 진시황보다도 훨씬 전에 살았던 인물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식의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인터넷 공간에는 너무 많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허황한 전설을 아무생각없이 지어내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호구는 해발 약 30미터 정도밖에 안되는 언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중제일산이(吳中第一山)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유는 오왕 합려의 무덤과 검지같은 유적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검지를 지나 위로 오르면 약간 평평한 곳이 나타납니다. 누가봐도 정상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문을 들어서면 운암사탑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기울어진채로 잘 버텨내고 있다고 해서 중국판 피사의 사탑으로 널리 알려진 탑이죠.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