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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5 중국-붉은기의 흔적:강소,호남(完)

소주 - 오씨의 시조를 모신 태백묘

by 깜쌤 2015. 6. 17.

 

 “이(李), 왕(王), 장(張), 유(劉), 진(陳), 양(楊), 황(黃), 조(趙), 주(周), (吳)”

 

눈치가 빠른 분들은 재빨리 감을 잡을 것입니다. 앞에 소개한 한자는 모두 중국의 성씨들을 나타낸 글자인데 중국의 10대 성씨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오씨만 다른 색깔로 표시를 해두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태백묘(泰伯廟)라는 이름을 가진 곳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태백묘는 ()씨와 관련이 깊습니다. 오씨들은 중국 동남부에 많이 보이는 대성입니다. 싱가포르와 베트남에도 많이 살고 있어서 세계에서 열번째로 많은 숫자를 가진 성씨로 인정받고 있는 중입니다. 동남아인들 가운데 자기 성씨가 이라고 하는 분들은 한자로 쓸 경우 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태백묘를 찾은 것은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알고 간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묘'라고 하는 것은 사당을 의미하는 글자입니다. 무덤을 의미하는 글자와는 한자가 다릅니다. 큰 도로 이면을 흐르는 물길을 보다가 우연히 찾은 것이죠. 더구나 입장료가 없어서 더 좋았습니다. 입구 현판에 태백묘라는 글씨가 뚜렸합니다.

 

 

입구 양쪽으로는 가지를 밑으로 늘어뜨린 멋진 나무가 두그루 자리잡았습니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더니 양쪽에 비각이 보였고 저 안쪽에는 붉은 색을 칠한 건물이 의젓하게 자리잡고있었습니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어딘가 기품이 있고 단정했습니다.

 

 

양쪽 회랑으로는 전시관을 겸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한번 올라가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중국의 경제사정이 좋아지면서 뿌리찾기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서 그런지 자기들 성씨를 창시한 시조를 모신 이런 사당이 군데군데 만들어진듯 합니다. 

 

 

벽면에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자료가 그득했습니다. 나는 내가 이름을 들어보아서 아는 사람만 대강 골라서 찍어보았습니다.  

 

 

먼저 오왕 부차가 등장합니다. 오왕이니까 당연히 성씨는 오씨일 것입니다. 오부차와 월구천에 얽힌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되풀이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절강성을 여행하며 써둔 여행기가 "중국의 베니스를 찾아서"인데 월나라의 근거지에 해당하던 소흥과 항주편에 구천과 부차에 관한 이야기를 제법 자세하게 써두었습니다. 

 

 

 이번에는 오왕 합려입니다. 부차가 합려 구천같은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때만 해도 인간들이 겸손해서 그랬던지 함부로 '제'라는 호칭은 쓰지않고 스스로를 '왕' 정도로만 불렀습니다. 그러기에 오왕이라는 식으로 칭하는 것이죠. 물론 중앙에 라는 정통왕실이 있었기에 그 정도로 몸을 낮추었겠지요.

 

 

 오왕 (=료)입니다. 흥미진진합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가장 멋진 기록은 누가 뭐래도 사마천이 쓴 사기입니다. 사기(史記)를 읽어두면 환하게 알 수 있는 인물들이죠.

 

 

드디어 오왕 태백이 등장합니다. 이 분이 오씨의 실질적인 시조입니다. 오왕 태백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공자가 쓴 논어에 등장합니다. 더 오래된 기록이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말이죠.

 

 

오씨 역사와 관련있는 많은 인물들의 인물도가 벽면에 가득 붙어있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 다 살피기에는 역부족이기에 대강 보고 건너뛰었습니다.

 

 

이런 시설물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소주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관람을 하다가 창문으로 밖을 보았더니 맞은편에 있는 전시관이 보였습니다.

 

 

 나는 관람을 계속했습니다. 드디어 태백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사진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공자를 그린 초상화입니다. 공자가 태백에 관해서 언급한 부분을 잠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출전은 논어 태백편입니다.

 

『子曰 泰伯은 其可謂至德也已矣로다 三以天下讓하되 民無得而稱焉이여』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태백(泰伯)은 지극한 덕(德)이 있다고 이를 만하다. 세 번 천하를 사양하였으나 백성들이 그 덕을 칭송할 수 없게 하였구나”』

  

 

글에 얽힌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원래 태백이라는 사람은 주나라 대왕(大王)의 큰아들이었습니다. 둘째가 중옹(仲雍)이며 셋째는 계력(季歷)이라는 인물입니다. 막내인 계력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큰 덕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계력의 아들 이름이 창()입니다.

 

마침 천하를 다스리던 은나라(=상나라)는 갈수록 정치가들의 행태가 문란해졌기에 인심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대왕은 이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은나라를 치고 싶었지만 장자인 태백이 따르지 않았기에 셋째인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시 창에게 왕위가 이어지도록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를 안 장자 태백과 차자 중옹은 형만이라는 지방으로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형만(荊蠻)이 오늘날의 강소성부근이 됩니다. 

 

 

결국 대왕은 나라를 계력에게 물려주었고 계력의 뒤를 이어 창이 왕이 되었는데 창이 다스리던 때에 천하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강국이 되었습니다. 창이라는 인물이 바로 주나라 문왕(文王)입니다. 문왕 사후 왕위에 올라 상(=은)나라를 물리치고 천하를 쟁취한 자가 바로 문왕 창의 아들인 발()인데 다른 말로 무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계단 모퉁이에 안전띠를 발라두어서 넘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태백은 형만으로 옮겨가서 나라를 세웠는데 그 나라가 오나라의 시작입니다. 태백의 무덤은 소주에서 아주 가까운 무석시에 있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태백은 중국 중앙부의 섬서성을 떠나 동남부의 강소성으로 이주한 것이죠 .

 

공자는 논어 태백편에서 왕위를 극구 사양한 태백의 지극한 덕을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칭송하고자 해도 자취를 감추어버렸기에 칭송하고자 해도 어쩔 수가 없도록 만들었으니 이 어찌 훌륭한 인물이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표현한 것이죠.  

 

 

위에 소개한 글의 원문에 빨간 글씨로 표시해둔 글자가 지덕입니다. 그래서 사당건물에 달린 현판의 글씨는 지덕전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사방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은 가도 이름은 남았습니다. 태백으로부터 수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인간성이 왜 이렇게 극도로 사악해져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덕전을 나온 나는 또다른 전시관에 가보았습니다. 지덕전의 출입구부근에는 태백의 족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청동기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전시된 이 솥은 아닐지라도 다리가 세개인 솥은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유물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 사당에 전시된 것은 모조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뜬금없는 소리겠지만 부여가 존재했던 중국 동북부 만주에는 유명한 홍산문화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만 중국인들은 벌써부터 그 문화를 자기들 역사라고 우기는 것을 보면 너무 슬퍼집니다. 앞으로 우리나라 젊은이들 가운데 홍산문화에 대한 깊은 식견을 가진 연구자가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역사는 항상 승자입장에서 기록되는 것이기에 진실을 벗어나 왜곡된 것도 엄청 많을 것입니다. 특히 고대사가 그렇습니다.

 

 

나는 다시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갔더니 소주의 물길이 등장했습니다.

 

 

큰길로 나간 우리는 다시 서쪽을 향해 걸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태백묘를 보았으니 출발부터 산뜻합니다.

 

 

계속 걸어가자 성문이 등장했습니다. 아마 서문에 해당할 것입니다.

 

 

자동차가 제세상인양 활개치는 이 시대에 수레라니요.........  나는 그 수레 한 대에서 역사의 흐름을  느껴보았습니다.

 

 

우리는 성문을 지나 성밖으로 나갔습니다.

 

 

성문 부근에는 물살 흐름이 제법 센 물길이 보였습니다.

 

 

수관교라는 이름을 가진 다리를 건너봅니다.

 

 

태호에서 생산된다는 그 유명한 기석(奇石)을 보았습니다.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기석은 우리와 조금 다른 것같습니다.

 

 

하여튼 우리는 성문을 지나 밖으로 나간 것이죠.

 

 

성문밖으로 나갔더니 우리들 눈앞으로 놀라운 장면이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소주기차역 앞에서 처음 본 그런 물길이 나타나면서 배들이 지나다니는 장면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성문밖에는 제법 큰 규모의 다리가 있었고 밑으로는 깊은 물길인데 배가 지나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인도 위에는 앙증맞은 생김새를 한 1인용 자동차가 서있었습니다.  

 

 

아! 이렇게 멋진 풍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습니다. 나중에 지도를 가지고 확인해보니 소주역앞의 물길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해자를 이용해서 배가 다닌다는 것인데......

 

 

 

지금 우리는 2번 지점으로 가려는 것입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뜹니다.

 

1 - 태백묘

2 - 산당하 부근

3 - 유원

번호표시가 되지않은 빨간점 - 성문의 위치

 

 

남선북마(南船北馬)라고 하더니 딱 들어맞는 말입니다. 중국 북쪽에는 말이 많기에 사람들은 말을 타고 다니고 남쪽은 물길이 발달했기에 배를 타고 다닌다는 현실을 반영한 말이겠지요.

 

 

나는 멍하니 서서 지나다니는 배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배들이 지나다니는 곳으로 가려면 일단 다리를 건너야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황금색으로 칠한 유람선이 접근해오고 있었습니다.

 

 

성벽쪽 물길 위로는 멋진 아치모양의 다리가 걸려있었습니다.

 

 

그쪽으로 가보기 위해 시도를 해보았습니다만 성벽 밖에서는 그쪽으로 갈 수가 없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건너편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뿐이라는 말이 됩니다.

 

 

저 멀리 보이는 돌다리를 건너가야겠지요.

 

 

물길 맞은편 공간의 풍광이 워낙 멋있어보였길래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뭐 그리 급할게 있겠습니까?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나니 오히려 편해졌습니다.

 

 

바이두지도를 가지고 확인해보니 방금 우리가 보았던 물길이 산당하(山塘)였습니다. 소주에 가시는 분들은 산당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