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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5 중국-붉은기의 흔적:강소,호남(完)

미려별서의 기구한 운명 - 송가황조

by 깜쌤 2015. 4. 20.

 

 1959년 8월 여산에서는 중국 공산당 8 중앙 위원회 8 총회가 열렸습니다. 1959년이라면 중화인민공화국(=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국)이 건국된지 10년밖에 지나지 않은 해입니다. 여산회의에서는 당시 중국 국방 장관이었던 팽덕회(懷 펑더화이) 주도하여 모택동(東 마오쩌뚱) 대약진운동, 인민공사,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이라고 하는 삼면홍기() 정책 비판하였던 것이죠. 

 

 

팽덕회가 누구입니까? 중국공산당혁명사를 빛낸 10대 원수중의 한명으로서 모택동, 주덕등과 함께 홍군을 창설하여 대장정에 참여했던 인물입니다. 1950년의 한국전쟁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사실이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혁명과 건국에 관여한 10대 원수

주덕 , 하룡 , 유백승 , 섭영진 , 진의 , 임표 - 남창봉기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인물들임

 팽덕회, 나영환, 엽검영, 서향전

 

 

 

 

모택동이 추진하던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를 비판하던 그는 결국 모택동의 분노로 인해 반당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숙청당하고 맙니다. 문화혁명때는 홍위병들이 그를 가두고 고문까지 하게 되고 결국 그는 1974년 병상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런 전말이 얽혀있는 곳이 여산회의 터입니다. 알고보면 재미있는 곳이지만 모르고보면 단순한 건물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곳이죠.

 

 

여산회의구지 맞은편 산자락밑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는 건물이 있습니다. 그 앞에는 바위 한덩어리가 올려져 있는데 어떤 연유를 담고있는 바위인지 설명이 없으니 수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위덩어리가 있는 건물 앞에서 본 여산회의구지 건물입니다. 세월은 사정없이 흘러 팽덕회도 모택동도 이제는 모두 과거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헛것이라면 헛것이죠.

 

 

원래 여산에서 회의를 자주 열었던 인물은 장개석이었습니다. 여산이 한때는 국민당정부의 여름 수도로 불릴 정도였으니까요.

 

 

가만히 살펴보면 곳곳에 유서깊은 건물들이 많이 숨어있습니다. 원래 여기는 서양선교사들의 여름 피서지로 개발된 곳이었습니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약 백여년전의 일이죠.

 

 

길을 따라 걷던 우리는 미려별서를 찾아나서게 됩니다. 미려별서라고요? 서라는 글자는 로 씁니다. 별서라고 하면 '들이나 산에 한가롭게 따로 지은 집'을 말함이니 우리나라식으로 표현하면 별장 정도의 의미를 가지게 되겠지요. 

 

 

 현지인에게 미려별서의 위치를 물어보고 싶어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할 수없이 우리들은 이정표 하나에만 의지하여 별장을 찾아서 이리저리 돌아다녀본 것이죠.

 

 

여기는 고급 별장 천지입니다. 중국세상 천지에 이런 곳이 또 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누가봐도 하나같이 고급주택입니다.

 

 

틀림없이 이 부근에 있어야 하는데.......

 

 

이리저리 휘감아돌기를 몇번 하다가 마침내 별장 앞에 서게 됩니다.

 

 

마침내 우리가 찾아낸 것은 미려수퍼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근에 미려별서가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찾았습니다. 미려산장이라는 건물도 보이네요.

 

 

미려산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저 건물은 상업적 용도로 쓰이는 건물이고 미려별서는 왼쪽에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 건물입니다.

 

 

미려라고 우리식 발음으로 한자를 읽었습니다만 중국인들은 메이루라고 발음합니다.

 

 

들 야(野)자 밑에 흙 토(土)가 있는 글자가 농막 서()라는 글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읽으면 미려별서가 되는 것이죠. 도대체 무슨 건물인지 두 눈 크게 뜨고 이제부터 안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앞에 보이는 저 작은 돌집이 원래 미려산장의 수위실 겸 경비실이 되는 모양입니다.

 

 

하얀 현판에 그런 글씨가 보이지 않습니까?

 

 

안내판을 잘 보면 트루먼 미국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5성장군이었던 마샬원수가 여산에 여덟번이나 장개석을 만나러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946년이라면 세계2차대전이 끝난 그 다음해의 일입니다. 만약 그때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을 했더라면 세계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것입니다. 어쩌면 북한이라는 나라가 등장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한국전쟁에 중국이 끼어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별장 한쪽에는 야외수영장도 있고 심지어는 방공호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미려별서 안으로 들어서면 진한 초록색 카펫을 깐 방이 눈길을 끕니다.

 

 

방안의 집기들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이 되어 있는데요, 저기 보이는 저 테이블에서 장개석이 별장을 찾아온 중요한 손님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주은래도 몇번씩이나 여기를 찾아와서 장개석에게 국민당과 공산당이 공동으로 항일투쟁에 나서자고 설득을 했습니다.  

 

 

물론 장개석은 그런 요구를 물리쳤었고요......

 

 

사진속의 인물이 1930년대 중국대륙의 실권자였던 장개석과 그의 세번째 부인인 송미령입니다.

 

 

송미령의 침실입니다. 초록색 카펫이 단정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방안에 있는 가구들은 송미령과 장개석이 썼던 원래 가구들이라고 합니다. 

 

 

 다른 쪽에는 욕실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좌변기도 보입니다.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시설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들이 사용했다는 냉장고는 유리상자속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방에는 송미령여사가 그렸다는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림 솜씨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일본과의 항전에서 승리한 후 그린 작품들이라고 하는군요.

 

 

피아노도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상아(코끼리 어금니)공예품도 남아 있더군요.

 

 

각방마다 여러 자료들이 즐비했습니다.

 

 

장개석의 모습들이 다양하게 남아있더군요.

 

 

송미령이 읽은 책들 같습니다. 그녀는 로마황제 클라우디우스에게도 관심이 있었던 것일까요?

 

 

장개석을 위해 경덕진에서 생산한 그릇들입니다. 무늬가 엄청 화려하더군요.

 

 

장개석의 필적과 그가 사용했던 검도 남아있었습니다.

 

 

왕정위의 글씨도 보이고.....  왕정위는 나중에 일본이 세운 남경괴뢰정부의 수반이 되어 중국 모든 인민들이 '국인개왈가살(國人皆曰可殺)'을 부르짖는 대상이 되고 맙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이완용같은 역적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장개석의 동서였던 공상희의 필적도 보입니다. 공상희!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 보자면 공상희는 매판자본의 대표적인 인물이겠지요.

 

 

송미령의 사진도 제법 남아있었습니다.

 

 

바로 이 여성이 송미령입니다.

 

 

송미령의 자매들이죠. 그들은 중국 근대사와 현대사를 주름잡은 엄청난 자매들입니다. 여기가 미려별서인 이유는 송미령의 미()에서 한 글자를 따왔기 때문이죠. 장개석은 나중에 상하이에도 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집은 송미령의 오빠가 되는 송자문이 마련해 준 것이라고 합니다. 그 집 이름은 애려(愛廬)라고 붙였고 항주 서호에 있는 별장에는 징려(澄廬)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여산별장은 미려라고 이름을 지었던 것입니다.

 

 

사진의 가운데가 중국 절강재벌이었던 공상희의 부인이 되었던 송애령이고 왼쪽은 손문(=쑨원, 손중산)의 부인이 된 송경령이며 오른쪽이 장개석의 부인이 된 송미령입니다. 그녀의 오빠는 송자문으로서 중국 역사에 기록을 남길 정도의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참으로 막강했던 집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은 그들 자매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찍은 사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들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송가황조라는 영화였습니다. 송애령은 돈을 택했고 송경령은 나라를 택했으며 송미령은 권력을 택했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은 아니었죠. 

 

 

다른 방으로 가보았더니 모택동의 유품들이 남아있었습니다. 대륙에서 국민당 세력이 축출된뒤 여산의 미려별서는 중국공산당이 접수하여 모택동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모택동의 글씨는 언제봐도 표시가 납니다.

 

 

모택동이 사용했다는 도시락통입니다.

 

 

사람은 가고 글씨가 남았습니다.

 

 

모택동이 썼다는 비파행입니다. 비파행은 백거이의 작품이지 않습니까?

 

 

모택동은 어떤 음악을 좋아했을까요?

 

 

윗층에도 약간의 유품이 있습니다.

 

 

모택동이 사용했다는 방에는 빨간색 카페트가 깔려있었습니다.

 

 

그가 홍군의 지도자였기 때문일까요?

 

 

위에서 언급했던 여산회의때 모택동은 여기에 머물렀던 모양입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