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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5 중국-붉은기의 흔적:강소,호남(完)

혁명열사릉원에 흐르는 평화

by 깜쌤 2015. 3. 10.

 

지금 우리가 가려고 하는 곳은 장사시내에 있는 호남성박물관입니다. 우리는 장사기차역 부근에서 내렸습니다. 버스를 바꿔타기 위해서였죠. 장사역전 광장에서 136번 버스를 탔습니다. 요금은 2원이었습니다. 스마트폰을 꺼내 버스노선을 살펴보았습니다. 136번 버스는 호남열사릉 앞을 거쳐서 갑니다. 113번 버스도 간다고 했는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호남성박물관 앞에서 내려 버스 정류장에 있는 안내판을 살폈습니다. 배낭여행안내서에 나와있는대로 113번 버스도 여기를 거치는가 봅니다.

 

 

오긴 왔는데 무언가 조짐이 수상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박물관은 확장공사중이었습니다. 공사의 규모를 보니 신축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지 싶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서한시대 유물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장사시 마왕 무덤에서 출토된 그 유명한 미이라를 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그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평생을 벼르고 벼르던 기회였는데 말이죠.

 

 

공사현장 부근의 휴대전화대리점에는 삼성과 애플, 화웨이같은 상표들이 보였습니다.  

 

 

순간적으로 난감해졌습니다. 시각은 오후 4시 정도가 되었는데 호텔로 돌아가기에 이른 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인근에 혁명열사릉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거기를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박물관 공사현장을 눈앞에 두고 발걸음을 돌려야했습니다. 다시 언제 장사에 가게될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그저 아쉽기만 했습니다. 모택동의 대장정로를 따라 간다고 해도 장사에 새로 들를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장사만해도 길거리가 깨끗한 편이었습니다.

 

 

장사는 호남성의 성회(=성도)이니 규모도 있고 볼거리도 제법 됩니다.

 

 

장사니 호남성이니 성도니 하는 용어를 썼습니다만 중국 지도를 머리속에 넣어두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곤란하지 싶습니다.

 

참고로 하나 말씀드리면 저는 이 여행기 속에서 중국의 고유명사를 우리말 발음을 기준으로 하여 표기하는 중입니다. 신세대 입장에서는 약간 불만스러울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차피 한문을 바탕으로 하는 발음이기에 우리에게 익숙한 소리로 표기하는 것이 낫겠다싶어 세운 원칙이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중국의 어지간한 도시에는 혁명열사릉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무료로 입장 가능합니다.

 

 

장사에서는 열사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여두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사는 중국혁명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두면 편리합니다.

 

 

중앙에 보이는 탑에 열사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향해 걸었습니다.

 

 

안내도를 보았더니 열사공원의 규모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탑을 향해 오르는데 숲속에서 노래소리가 들렸습니다. 고음을 시원스럽게 뽑아내길래 가수가 공연하는 줄 알았습니다.

 

 

반주기를 앞에두고 화면을 보며 노래를 부르는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이동노래방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노래솜씨가 시원스러웠습니다.

 

 

이제 입구까지 다다랐습니다.

 

 

탑을 중심으로 해서 통로가 사방으로 나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따가 북쪽으로 나있는 통로를 이용해서 나갈 생각입니다. 그쪽으로 버스가 지나쳐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기 때문입니다.

 

 

열사공원이니까 이런 탑은 호국영령을 모신 충혼탑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내부는 간결했습니다.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단정했기에 간결미가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벽면에는 혁명의 와중에 희생된 사람들 사진이 걸려있었습니다. 나는 아는 사람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제일 처음 눈에 띈 사람은 모택동의 두번째 처이자 혁명동지이기도 했던 양개혜습니다. 그녀는 모택동의 스승의 딸이기도 했습니다.

 

 

서른한살의 나이로 희생당한 송교인도 있었습니다.

 

 

담사동의 사진도 보였습니다.

 

 

중앙 공간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배치된 방에 열사들의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중앙 홀에는 모택동의 필적이 걸려있었습니다.

 

 

"살아서는 위대했고 죽어서는 광영이 있기를!"

 

 

모택동의 친동생인 모택담입니다.

 

 

친형인 모택동과 혁명동지들이 섬서성을 향해 대장정을 떠난 후 남아서 뒤처리를 하다가 서금소비에트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국부군에게 붙들려 처형당했던 인물입니다. 향년 서른이었습니다.

 

 

모택동의 친아들 모안영입니다. 양개혜와 모택동 사이에서 태어난 모택동의 큰아들인 셈이죠. 설명을 잘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1950년 11월 25일 한국전쟁에서 전사했습니다. 유엔군의 폭격을 맞고 죽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는 인물입니다.

 

 

뇌봉입니다. 전설적인 인물이죠. 중국대륙 곳곳에서 나는 뇌봉거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함께 구경한 우리 일행에게 약간 아는 척을 했습니다. 그런 인물들이 어떤 일을 했던가를 조금씩 이야기를 했던 것이죠. 열사탑을 나온 우리는 호수쪽으로 내려갔습니다.

 

 

물로 붓글씨를 쓰는 노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대단한 달필이었습니다. 그가 공원 돌바닥에 쓰는 시구가 눈에 익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당나라시대의 걸출한 시인이었던 두보의 등악양루를 쓰고 있었던 것이죠. 예전에는 그런 정도는 쉽게 외우고 다녔는데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니 인생이 허망하기만 합니다.

 

 

나는 내가 내려온 길을 뒤돌아보았습니다. 한번씩은 뒤돌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있는 행동인지 모릅니다. 영감님은 행인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글씨쓰기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호숫가에는 제법 너른 공터가 있었고 군중들은 휴식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기업체에서 실시하는 연수도 열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벌써 한물간 유행이었는데 말입니다.

 

 

호수에 담긴 하늘도 흐트러짐이 없이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이 엄청난 대륙에 혁명이라는 피바람이 한바탕 불고 지나간 뒤 이런 평화가 찾아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이제 중국에서 공산당의 이념은 말로만 남아있는지도 모릅니다.

 

 

정치인들은 끊임없이 이념과 투쟁을 추구할지 모르지만 일반 인민들은 번영과 평화를 갈구할 것입니다.

 

 

사실 말이지만 내가 중국땅을 아홉번이나 떠돌게 될줄은 감히 상상을 못했습니다.

 

 

죽을때까지 수십번을 더 와보고 배웠으면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젊었던 날에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더라면 관심분야에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투자해서 다양한 글을 썼을지도 모릅니다만 이제는 너무 늦었다는 느낌만 가득합니다. 

 

 

늦게마나 이런 여행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행복합니다.

 

 

러시아 여행이나 중국여행은 상상도할 수 없었던 시대에 청춘을 보낸 것은 두고두고 후회스럽기만 합니다. 

 

 

호수가에는 맥도널드 가게가 있었습니다. 15원짜리부터 있는 모양이네요.

 

 

나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작은 호수속에는 잉어들이 가득했습니다.

 

 

한쪽에서는 금붕어뜨기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들도 보였습니다. 괜히 흐뭇했습니다.

 

 

열사공원에는 잔잔한 평화가 넘치고 있었습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