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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5 중국-붉은기의 흔적:강소,호남(完)

천년학부를 만들어낸 악록서원을 보았습니다

by 깜쌤 2015. 2. 25.

 

악록산공원 정문을 들어선 뒤 우리는 정상을 향해 똑바로 난 길을 택하지않고 오른쪽으로 꺾어진 길을 통해 애만정으로 가는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애만정은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애만정 가는 길 오른쪽 아래 숲사이로 커다란 기와집건물이 보여 어떤 건물일까하고 무척 궁금해하며 걸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거기가 악록서원이었던 것이죠. 하마터면 놓칠뻔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모택동 조각상을지난 도로 그 어디에선가 악록서원이라는 작은 팻말을 본것도 같았습니다. 그쪽으로 가면 정문을 만났텐데 지금은 후문쪽으로 접근해버린 것이죠. 

 

 

장사까지 찾아왔으니 여기는 서슴없이 들어가보아야합니다. 악록서원을 놓쳐버리면 호남성 장사까지 여행온 보람이 없어져 버립니다.

 

 

요금은 중국돈으로 50원입니다. 우리돈으로 따져도 9,000원이라는 돈이 되니 입장료가 만만치 않게 비싸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들어가서 안내도를 살펴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김구선생의 유적지가 이 부근에 있었던 것이죠. 사실 그런 유적지가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앙운정이라는 정자부근에 '김구선생 요양처 구지'가 있었던 것이죠. 김구선생이 요양을 하신 옛터라는 말이겠지요.

 

 

나는 앙운정이라는 낱말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후문으로 입장했으니 서원구경을 뒤에서부터 역순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서원이라고 하면 오늘날 입장에서 볼 때는 지방에 있었던 고등교육기관 정도일 것입니다. 악록서원 정도의 규모와 주희, 장식같은 분으로 짜여진 교수진이라면 그것은 일류대학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중국인들 처지에서 보면 악록대학 아래에 자리한 호남대학교를 두고 천년학부라고 불러도 아무런 스스럼이 없을 정도가 되는 것이겠지요.

 

 

서원으로 내려가는 통로에는 회벽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서 안타까운 모습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대나무사이로 서원을 이루고 있는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상당히 운치있는 풍경이었습니다. 검은 지붕과 하얀벽은 휘주스타일의 영향을 받은듯 합니다.

 

 

그러나 지붕의 모습은 휘파(휘주스타일)건물과 많이 달랐습니다.

 

 

지붕의 측면곡선이 상당히 유려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찾아본 우리나라 경상도지방의 여러 서원과 비교해볼 때, 규모와 구조면에서 큰 차이점이 보였습니다.  

 

 

통로벽면에는 수많은 비문들이 가득했습니다. 눈이 번쩍 떠질만한 대가들의 글씨를 찾아보았습니다만 견문이 좁아서 그런지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악록서원이 자리잡은 이 골짜기를 예전부터 청풍협이라고 불렀던 모양입니다.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을 모아 멋진 정원을 조성했습니다.

 

 

이곳을 거쳐간 학자들의 면면이 범상치 않습니다. 주자학을 창시한 주희만 해도 여기서 강의를 했으니까요.

 

 

살다가살다가 말입니다, 서원을 정문에서부터 구경하지 않고 뒷문으로 들어와 살펴보기는 이번이 처음인것 같습니다.

 

 

예전 대학치고는 곳곳에 동양적인 어떤 품격이 배여있다고나 할까요?

 

 

악록서원의 두기둥은 아마도 주자학을 정립한 주희호상학을 만들어낸 장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중에는 양명학의 창시자인 왕수인(=왕양명)도 여기서 공부를 하고 강의를 했으니 예로부터 전통에 빛나는 인재양성소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중국 중세시대의 철학사를 논할때 악록서원을 빼고 말하면 이야기가 안될 정도라고 여겨도 될 것입니다.

 

 

백천헌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아 부근에 우물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건물 부근에는 우물이 있었던 것이죠.

 

 

문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우물이 있었습니다.

 

 

통로를 따라 이리저리 모퉁이를 돌아가다가 나는 엄청난 것을 하나 찾았습니다. 벽면에 새겨진 이 커다란 글씨들은 강당 벽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여기가 서원의 핵심시설 가운데 하나인 강당입니다. 제자들을 두고 강의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강당앞에 보이는 두개의 의자에 주희와 장식이 앉았다고 합니다. 의자 뒤쪽 위 황금색 바탕현판에 쓰여진 글귀는 '도남정맥'입니다. 청나라 황제였던 건륭제의 글씨로 전해집니다.  

 

 

저 자리에서 나름대로 학문적인 위업을 이룬 두사람의 석학 유학자가 토론까지 했다고 전해집니다. 의자 뒤편의 흰벽에 쓰여진 글귀는 '악록서원기'라는 글입니다.

 

 

글 말미에 보면 1167년에 장식이 쓴 것으로 나와있습니다.

 

 

강당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커다란 네글자는 '충효염절'입니다. 그래서 이 강당(講堂)을 다른 말로 '충효염절당'이라고도 한다네요.

 

 

주희의 친필로 알려져 있습니다.

 

 

딱 일년전인 이맘때 절강성을 여행하면서 무이산에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주희선생이 강의를 하고 학문에 정진했던 현장을 보고 감개가 무량했던 추억을 되살렸습니다. 나는 이런 것을 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합니다. 한사람의 사상이 조선역사 5백년 통치이념의 근간을 이루었다는 것도 신기하거니와 그런 일을 하도록 한 사상가의 친필글씨를 마주 대한다는 것이 어찌 의미가 없겠습니까? 

 

 

위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악록서원은 악록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원래 악()이라고 하면 큰산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사실을 알고보면 악록산은 그리 큰 산이 아닙니다. 아담한 크기를 지닌 낮춤한 산이라고 부르는게 옳은 표현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학문적인 업적을 이룬 서원이 자리잡았기에 그 위상은 한없이 높기만 합니다.

 

 

나는 서원 구석구석을 살폈습니다. 서원 구경이라고 하니 어떤 분들에게는 지극히 흥미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고대 중국의 대학탐방 정도로 이해하면 훨씬 편합니다.

 

 

나는 사당을 기웃거렸습니다.

 

 

서원을 빛낸 다수의 인물들이 모셔져 있는듯 합니다.

 

 

서원내에는 워낙 많은 시설들이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어서 하나하나 소개해드린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나는 흥미로운 공간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방들이 주욱 늘어선 것으로 보아 숙식을 해결하던 곳이 아니었나 하는 짐작을 해보았습니다.

 

 

제법 정갈했습니다.

 

 

건물은 밑으로 계속 이어져 있었습니다. 강당을 벗어나 내려가다가 돌아다보는 순간, 강당 건물의 현판에 쓰여진 글귀가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놀랍게도 "실사구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사구시! 학달성천! 도남정맥! 세개의 편액과 현판이 나란히 줄을 맞추어 서있는 곳이 강당건물이었던 것입니다. 학달성천이란 글자는 일부만 보이네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진리를 구한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 실사구시 아니었던가요? 실학파의 학문적인 사상에 영향을 준 글귀라고 배운 것 같습니다. 한자해석은 워낙 제각각이어서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기도 하니 조심스럽습니다.

 

 

건물마다 독특한 현판이 달려있었기에 그것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건물 처마밑 한구석에는 국화석이 놓여있었습니다. 꽃돌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 꽃무늬같으면 상당히 정교한 무늬라고 볼 수 있으니 가치가 꽤나 나가는 돌일 것입니다.

 

 

악록서원 하나때문에 악록산도 덩달아 이름이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건물 한가운데로만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 내려갔더니 드디어 정문이 나왔습니다. 원래는 여기에서부터 구경해야할 것을 우리는 거꾸로 내려오면서 구경을 해버렸던 것입니다. 나는 문득 최인호씨의 <바보들의 행진>을 떠올렸습니다. 팀리더를 맡은 제가 처음부터 바보짓을 한 것이죠.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