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 입장하고 있는 곳은 부자묘입니다. 묘를 나타내는 글자를 보면 廟라고 써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럴때 쓰는 '묘'라는 글자는 무덤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고 사당을 의미하는 글자입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공자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남긴 역사적 인물이 또 있을까요? 한시대에 걸쳐 영향력을 끼친 인물들은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모택동 같은 인물은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하여 중화인민공화국(=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국)을 설립하여 동북아시아와 세계정세에 나름대로 커다란 족적을 남겼습니다만 그의 사고방식과 그가 남긴 사상적인 영향은 이제 거의 소멸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공자도 한때는 정치에 뜻을 둔 인물이었습니다만 그것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열국 순회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입구를 안에서 가리고 있는 차면담(=집안
대성전 앞에는 공자의 상이 서있는데 계단 밑에는 복을 비는 곳인지 공자를 경배하는 장소인지 구별이 안되는 장소에 향로가 턱하니 놓여있었습니다.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향은 워낙 커서 향인지 막대기인지 구별이 안될때도 제법 많습니다.
공자상 앞에는 만세사표라는 글자가 뚜렸하게 새겨진 복전함이 놓여있었습니다. 저기에 왜 저런 것이 놓여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세사표(萬世師表)! 영원한 스승의 표상이라는 말이겠지요.
물을 담아둔 그릇 속에는 동전들이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이 돈들의 용처는 어디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동남제일학(東南第一學)! 자부심이 스며들어 있는 현판같습니다. 명은 남경으로 불리었던 이곳 금릉을 자기들의 첫도읍지로 정했습니다. 그런 뒤 유학을 부흥시켰기에 그런 현판을 달았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곳을 구경할때 통로가 없다고해서 돌아나오면 뒷부분을 못볼 경우가 생깁니다. 어디엔가는 반드시 통로가 있는 법이므로 살펴보는게 중요합니다. 남경 부자묘와 곡부에 있는 공묘를 비교해보고 싶다면 아레 글상자 속에 있는 들을 클릭해보면 더 좋을 듯 합니다.
부자묘 안에는 중국의 교육제도 발전에 관한 전시물들이 다수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제법 그럴듯한 자료들이 꽤보이더군요.
한자를 모르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이 여행기를 읽는 분이 젊은이라면 나는 한자공부 해둘 것을 권합니다.
21세기는 중국의 세기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와 한자를 알고 중국어까지 할 줄 안다면 글로벌 인재로 취급받을 것입니다. 이미 그런 날이 우리 눈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명덕당이라는 현판을 단 건물이 나타났습니다. 보통 학교같은 곳에서는 명륜당이라고 하는데 여긴 특별한 이름을 붙여두었습니다.
종각이 나타났습니다.
이 종을 언제 울리는지 궁금합니다.
명덕당 안에는 공자의 조각이 보였습니다.
이왕 들어왔으니 하나하나 살핍니다만 일반인들에겐 흥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양한 학습도구가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길 영'이라는 글자 하나에 붓글씨의 모든 기법이 들어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등학교때 뿌리깊은 종가 출신 친구가 전했던 말이라고 기억합니다.
그 말의 의미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근본이 얕은 시골뜨기니 그런 것을 제대로 알리가 없었던 것이지요. 영자필법이니 영자팔법이니 하는 말의 의미를 나중에 알았던 것입니다.
얕은 지식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살면서 참 많이도 느꼈습니다.
우리는 부자묘 참관을 마치고 돌아나왔습니다.
피곤을 느꼈지만 그래도 부근을 더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부자묘 인근은 멋진 전통상가건물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일단은 분위기만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부자묘 앞을 관통하는 큰길을 먼저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꼬맹이들이 떼를 지어 걸어오는게 보였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 같습니다.
부자묘에서 조금 걸어나왔더니 과거박물관이 보였습니다.
과거시험의 치열함은 중국이나 우리나라가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중국인들이 더 피터지는 경쟁을 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입신양명의 지름길은 고시합격이나 과거시험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과거합격에 목을 매었을까요?
나는 구경보다 그런 생각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패방에 걸린 현판을 보면 강남공원이라는 글자가 뚜렸하게 나타나있습니다. 공원이라는 한자를 보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공원(公園)이라고 쓰지 않고 貢院이라고 써두었습니다. 貢院 이라함은 과거시험장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경에 있는 과거시험장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죠.
남경공원터 옆에 있는 과거박물관에는 굳이 들어가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엄청 후회스럽네요. 남경은 명나라의 첫 서울이었습니다. 역사기록을 가지고 확인해보면 명나라때 과거시험에 합격한 인재들의 수가 제일 많았던 지방은 3280명을 기록한 절강성이었습니다.
청나라때 접어들면 강소성(강서성은 따로 있습니다)이 수위를 차지했는데 2920명이었다고 합니다(아틀라스 중국사, 사계절, 163쪽 자료). 지금 우리가 돌아다니고 있는 남경의 중심도시가 바로 강소성 소속입니다. 강소성 바로 아래가 절강성이고 중심도시는 항주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박물관이 하나 정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강남공원 인근의 거리는 단정하고 깔끔했습니다. 겨울철이지만 많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길을 걷다가 한번씩은 진회하쪽으로 가서 다리부근을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다리 위에서 살펴보는 진회하의 풍광은 압권이었습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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