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의 하얼빈에서 기차를 타고 심양으로 내려오면서 경치를 살핀 것이 14년전인 2000년 여름의 일이었다. 디지털 카메라가 일반화되기 전이었으니 비싸고 귀한 필름을 아끼느라고 사진을 많이 찍어두지 못한게 아직도 아쉽기만 하다.
심양에서 청나라시대의 유적을 본 뒤 기차를 타고 압록강가에 있는 신의주 바로 건너편의 중국 도시인 단동으로 이동했다. 하얼빈에서 장춘을 거쳐 심양으로 오기까지는 산다운 산을 보기가 어려웠다. 만주벌판이라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했던 순간이었다.
만주에서 한반도로 접근해옴에 따라 아름다운 산들이 나타나면서 심지어는 물까지 맑아지기 시작한다는 사실이 너무 신비스러웠다. 그뿐이랴? 기후까지 온화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일단의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건설하고 다시 일파가 내려와서 백제를 건국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만주를 여행해보고 나서부터였다. (사진 속에서 멀리 보이는 곳이 의성읍이다)
우리나라 고대사에 많은 부족국가가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이 더 나은 터를 찾아 이동하는 과정에서 주류로부터 조금씩 떨어져나와 정착한 것이 밑바탕이 되어 지역마다 작은 공동체가 출현하게된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정착해서 살던 곳에서부터 더 나은 터전을 찾아 조금씩 퍼져나간 것이 이유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에 사람들이 사람들이 살 터를 잡기 위해서 쉽게 선택할 수 있었던 방법은 높은 곳에 올라가보는 것이었다. 저 멀리 강이 굽이쳐흐르고 있는 곳부근에 조문국의 무덤군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 탑리를 중심으로 하여 조문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산줄기는 구미의 금오산일 가능성이 높다.
금성산에만 올라서봐도 봉화의 청량산과 구미의 금오산과 대구 팔공산과 영천의 보현산이 보일 정도이니 높은 산 몇군데만 올라가서 보면 동부 영남의 지세를 파악하는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길래 고산자 김정호선생은 기를 쓰고 높은 산에 올라가보았으리라.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방어시설로 쓸만한 산이나 절벽이나 언덕이 있어야하고 마실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어야하며 교역을 위해 바다나 큰 강을 끼고 있어야 한다. 강이 없을 경우에는 일년내내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개울이라도 존재해야하며 농사를 짓고 살만한 비옥한 토지가 사방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금성산에 올라서서 보면 그런 조건을 갖춘곳 가운데 한군데가 이 산자락이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나라의 수도가 될만큼 너른 평야와 큰 강을 가진 곳은 아니지만 기껏해야 수천내지는 수만 정도의 인구였던 부족국가의 입장이라면 터잡을 만한 곳이다.
나는 바위끝에 앉아 사방을 살피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어느 정도 쉬었으니 다음 산봉우리를 향해 걸어야했다.
봉수대가 300미터 전방에 있단다. 나는 처음에 금성산 정상이 그곳인줄 알았다.
비탈길을 올랐더니......
저만치 앞에 돌담 비슷한 것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조문국에서 쌓은 산성의 흔적인줄로만 알았다. 실제로 그런지 안그런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으므로 함부로 판단할 성질의 문제는 아니다.
봉수대터라고 한다.
봉수대를 둘러싼 석벽이 아직도 조금 남아있다 .
봉수꾼들이 여기서 생활하려면 꽤나 힘들었겠다.
국가의 안보를 책임진 사람들을 조선시대에 천민취급했다는 사고방식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국어나 역사교과서를 보면 조상들 가운데 풍류가객들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지방관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종종 풍류를 즐겼다는 식으로 묘사한 부분이 나오는데 요즘 기준으로 말한다면 일을 하지 않고 놀았다는 것으로밖에 해석할 길이 없는 것 아닌가?
2009년 7월에 발굴했을때 여기에서는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기와장들이 상당수 나왔다고 한다.
그때 나온 기왓장들의 모습이다. 쌓아놓은 모습이 작은 탑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봉수대에서 쉴 수가 없었다. 시간이 급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봉수대에서 가장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이 팔공산이다. 왼쪽에 텐트모양(삼각형모양)으로 솟아오른 봉우리는 군위군과 영천시 경계면에 있는 산봉우리다. 그 너머부터는 영천이라는 말이 된다.
봉수대가 있는 봉우리에 올라서자 비로소 금성산 정상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벌써 몇시간째 걷고 있는 중인지 모른다.
오늘 종일 제법 많이 걸었다. 팔공산 너머가 대구광역시다. 나는 금성산 정상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내려갔다가 오르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금성정상까지 200미터가 남았다는 안내판을 만났다.
이제 거의 다온듯 하다.
금성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화산이라고 한다. 모습만 봐도 확실히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옆에서 보면 이해하기가 어려워도 조문국 고분이 있는 곳이나 탑리역에서 금성산을 보면 화산임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다.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해발고지 530미터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충분히 오를만한 가치가 있는 산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거의 4시간만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그냥 오르면 한시간도 안걸릴 것이지만 수정사를 갔다가 능선을 따라 왔으니 빙 둘러서 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산정상부분은 약간 평평하다. 젊어서 올랐을땐 정상부에 풀도 적었고 약간 움푹했으며 모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니 조금 변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금정산 정상에다가 묘를 쓰면 3년안으로 큰 부자가 된다는 말은 어렸을때 들은 기억이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
농사철인 초여름부터 좀 가뭄을 탄다는 느낌이 들면 인근 동네 사람들은 금성산 꼭대기에 올라 무덤이 있는지를 살폈다고 한다.
남의 불행을 딛고서라도 한번은 떵떵거리며 잘살아보고 싶다는 민초들의 염원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산이 금성산이다.
주차장은 저수지 부근에 있다. 저주지가 있는 곳이 원래 산성의 입구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나에게는 산을 내려가는 것이 오르기보다 더 힘이 든다. 무릎이 안좋아서 생긴 현상이다.
정상 부근에 전망대가 있다. 나는 전망대로 가보기로 했다.
바로 저기다. 꼭 저 자리에는 한번 서봐야 하는 곳이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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