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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초등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사람살이/옛날의 금잔디 Long Long Ago (고향)

물에 잠긴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2

by 깜쌤 2014. 10. 1.

 

어머니 아버지께서 여기를 떠나시시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여기에서 험한 꼴을 너무 많이 당하셨기 때문이었다.

 

 

빽(백그라운드 Background)과 돈이 승진과 취직을 결정하던 시대속에서 선하고 점잖은 마음자세를 가진 아버지가 살아나갈 길은 그리 쉽게 트이지 않았다. 그런 것이야 오늘날에도 흔한 현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부하직원의 싸움을 말리려다 크게 다친 아버지에게 주어진 결과는 직장에서의 강등이었다. 승진은 바라지 못할지라도 위로와 격려대신 강등이라니.....  의료보험이 없던 시절이라 엄청나게 들어가는 치료비를 감당하느라고 망해버린 집안 경제를 되살릴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른 것은 다 참고 견딜 수 있지만 나때문에 중학교진학조차 하지 못했던 바로 위 누나를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마음이 아프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남자인데다가 집안의 맏이라고 해서 중학교를 꼭 보내야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결정을 하셨다.

 

 

나에게 여기는 가슴아픈 사연이 가득한 곳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온집안 식구가 모두 한꺼번에 죽을 뻔하기도 했다. 단돈 1원때문에 저녁으로 먹을 좁쌀 - 쌀이 아니고 보리쌀도 아니었으며 노란 좁쌀이었다 - 두 되를 구하지 못해 쥐약을 먹고 죽자는 이야기를 들었던 곳이 여기다. 자녀들이 밥을 먹지 않으려고 한다면 글상자속의 글을 한번 보여주어도 좋겠다.

 

 

                                    http://blog.daum.net/yessir/2227137

 

 

기차역이 다가왔다. 논밭이 거의 없는 좁은 산골짜기 동네라 아이들이 놀만한 공터가 없었기에 철도보선사무소 옆 공간이 동네아이들 모두가 모여 놀 수 있는 유일한 놀이터였다. 나는 그 놀이터 장소를 밟아보았다.

 

 

지금은 다 메워졌지만 산밑은 엄청나게 깊은 웅덩이였다. 워낙 험한 곳이라 한번도 내려가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플랫폼이 있던 공간의 흙도 모두 파내서 가져가버렸다. 아마 호수주변을 도는 순환도로를 만들기 위해 터돋움을 하는 곳에 쓸 모양이다.

 

 

그바람에 기차역이 공중에 올라앉은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나는 화장실 겸 창고를 들여다보았다. 아버지의 체취가 어디엔가는 묻어있을 것이지만 맡을 길이 없다.

 

 

어린 시절에는 기차역과 보선사무소 직원이름을 다외웠었다. 나는 뭐든지 닥치는대로 외웠다. 외우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그냥 외워졌던 것이다.

 

 

큰누님과 부모님의 기대가 컸던 아이였지만 시골학교 선생으로 인생을 끝냈으니 허무하기만 하다. 세상을 보는 눈이 좁았으니 필연적인 결과인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간에 인생을 망친 셈이 되었다. 젊었던날 나는 책이 너무 좋아서 뭐든지 읽고 싶었다. 읽을 책을 구하기 위해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도서관 옆에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가장 가까운 친척인 당숙의 말씀에 의하면 이 부근은 한국전쟁때 치열한 격전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도 포탄파편을 찾으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곤 했었다.

 

 

그것도 이제는 다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의 지나간 이야기로만 남았다.

 

 

마을 부근의 논을 갈아엎으면 화약들이 논에 발갛게 나타났다. 그걸 몇깡통씩이나 주워서 불꽃놀이도 하고 심지어는 물고기를 잡는데도 사용했다.

 

 

철로를 걷어내고나니 휑함 그 자체만 남았다.

 

 

나는 역건물로 들어가보았다.

 

 

대합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파편들만 뒹굴고 있었을 뿐이다.

 

 

왜 이리도 허무하던가 말이다.

 

 

장날이면 흰옷입은 사람들이 강건너 마을에서 재너머 마을에서 떼지어 몰려들어 북적이던 곳이 이제는 사람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대합실 앞쪽 저 은행나무도 올 가을만 노랗게 물들이고나면 내년쯤에는 물속에 잠길지도 모르겠다. 녀석들은 다가오는 제 운명을 알고나 있을까?

 

 

나는 다시 플랫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측백나무 울타리 밑은 폭이 좁은 기다란 논이었고 그 너머는 곧이어서 강변이었다. 홍수가 지나고 나면 왕버들이 자라던 강변은 한동안 뻘로 덮였었다.

 

 

기차역 사무소쪽으로 가보았다.

 

 

2교대로 밤낮없이 근무하던 역무원들조차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친구아버지도 계셨더랬다.

 

 

차표를 팔고 일을 하던 사무실 공간도 마구 어지럽혀져 있었다.

 

 

돈이 되는 물건이라면 다 끌어모아가는 수집꾼들이 이런 공간을 온전히 놓아두었을리가 없다.

 

 

기차역 사무실에는 반드시 앞으로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 사령실 역할을 하는 곳이다.

 

 

철로 양쪽을 살피면서 열차 진입을 허락하기도 하고 통제하기도 하던 제어공간이라고 보면 된다. 이 공간속에는 통표가 들어있는 기계장치가 배치되어 있었다. 기차가 오면 통표가 들어있는 가죽으로 겉을 씌운 둥근테를 역무원이 가지고 가서 기관조사와 교환했었다.

 

 

정차하지 않고 지나치는 기차들은 아슬아슬하게 통표를 수거해갔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몇번씩 구경하기도 했다.

 

 

이제 그런 시설들은 다 사라졌다.

 

 

여기도 물에 잠길 것이다. 기차역 건물을 철거하는지 아니면 그냥 남겨두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간에 물고기들 집이 될 운명임은 틀림없다.

 

 

결국 그게 그리될 팔자였던 모양이다.

 

 

울타리로 사용되었던 측백나무들을 그냥 죽이는 것은 너무 아까운 일이다. 캐내어 가서 마당둘레를 따라 빽빽하게 새로 심으면 멋진 자연산 울타리가 될터인데......

 

 

나는 다시 대합실을 거쳐 나와서 역건물 뒤 마당으로 가보았다.

 

 

건물 옆에 우물이 있었는데 언제 메워졌는지 알길이 없다.

 

 

우물에는 도르레가 걸려 있었는데.....

 

 

역건물 옆에는 포도나무가 한그루 자라고 있었다. 햇살이 뜨거운 여름날이면 나는 한번씩 몰래가서 그 렇게 시기만 했던 초록색 포도알갱이를 역무원들 몰래 몇알씩 따먹기도 했었다. 배가 너무 고팠었기에...... 그것도 이제는 다 꿈속의 일이 되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