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사용 차량과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천천히 걸어나갔다.
고개마루로부터 내가 걸어온 길이다. 이젠 앞으로 이 길을 사람들이 애용하게 될 것이다.
헐려나간 동네 집터 옆과 뒤쪽 산들도 이발을 하듯이 일부를 밀어버렸다. 예전에 산에 오르던 오솔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저런 길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쳐 놀라며 옛 기억을 되살렸다.
도로를 만드느라 잘라낸 산허리에다가 황화코스모스를 길러두었다. 잘한 일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흉측했으랴?
예전에는 여기가 모조리 너덜이었다.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자갈더미가 가득해서 너덜을 미끄러져내려가는 놀이를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올랐다. 자갈더미들이 산비탈에 깔려있으면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가는 자연현상을 무엇이라고 했던가?
왜 그 용어가 생각나지 않는지 모르겠다.
저 앞쪽으로 다리가 나타났다. 평범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엄청높은 다리다.
동동 뜬 가을 구름이 하늘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식물의 힘은 위대하다. 어떤 거치른 곳이라도 일단 한번 터를 잡고 살아가기 시작하면 사그라들줄 모르는 그 생명력에 경외감을 느낄 정도다.
다리 난간 공사는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있었다.
다리 가까이로 다가가자 내성천이 슬슬 그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다리 난간쪽으로 붙어서서 아래를 살폈다.
다리밑으로 사라져버린 동네터가 그 모습을 나타냈다. 바로 저곳이다. 내가 6년동안 살았던 집은 붉은 지붕이 보이는 저 부근 어디엔가 있었을 것이지만 이젠 집터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철길이 지나갔던 곳도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망연자실한 심정이 내어 하염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마을뒷산까지 올라와본 것이 도대체 얼마만이던가? 거의 50년은 된 것 같다. 인생무상이며 상전벽해라고 하더니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보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중앙선 철길을 만들기 위해 쌓아올렸던 인공둑도 이젠 거의 걷어낸듯 하다. 작년에 왔을때는 철길을 걷어내서 흔적이 없더니 이젠 철길이 지나갔던 둑도 사라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얀 모래가 가득하던 강변에는 잡초들이 가득했다. 생태계가 완전히 달라져버린 것이다.
내가 살았던 동네가 사라진 원인이 레일 주위에 깔 골재채취로 인한 황폐화때문이었다면 학교가 사라지고 생태계가 엉망이 되어버린 것은 준공을 눈앞에 둔 댐건설 때문이다.
S자 모양으로 몇번이나 휘감아 흐르면서 절경을 만들어냈던 내성천 물길가운데 특별히 좁은 곳을 골라 댐공사를 시작했는데 이제 거의 완공단계에 들어섰다. 그 댐이 거만스런 자세로 흉물스레 강을 가로막고 턱 버티고 서있었다. 사진 속 아래쪽 앞으로 보이는 건물이 예전의 기차역이다.
나는 사라진 동네와 내성천의 모습들이 너무 애처롭게 여겨져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모르는체 무심한듯 흐르는 흰구름들이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다리 난간 밑으로는 지난 수십년동안 철도용 골재채취를 위해 야금야금 파먹어들어간 흔적이 흉칙스런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물이 채워지면 여기에는 대물 고기들이 휘젓고 다닐지도 모르겠다.
속살을 다 드러낸채로 흉물스런 몰골을 보이는 있는 이 산봉우리는 원래 경사가 상당히 급한 가파른 바위 봉우리였다.
꼭대기 봉우리부근 능선에는 참나무들이 즐비했고 참나무 숲 위로는 솔개나 새매들이 상승기류를 타고 유유히 떠있기도 했던 곳이었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할말을 잊었다. 이렇게라도 기록을 남겨두어야 물에 잠기고 난 뒤에 예전의 그 모습을 상상이라도 해낼 수 있으리라싶어 해마다 찾아와서 사진을 찍어두는 것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일도 당할 수 있는 것이구나 싶었다. 하기사 그동안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보다 험한 꼴을 어디 한두번 겪어보았던가?
내가 자주 놀러갔던 기차역도 이젠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플랫폼도 철길도 다 사라지고 없었다. 아! 지나간 일들이 정녕 꿈만 같았다. 1967년 1월의 어느날, 화물기차칸에 이삿짐을 싣고 여기서 기차로 두시간 반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갔던 역이 바로 내 발 아래 저 밑에 있는 것이다.
역에 배웅을 나왔던 친구들의 모습조차 이제는 너무 기억이 희미해져서 가물가물해지고 있다. 돌아가신 부모님 친구분들도 계셨더랬는데...... 그 분들도 이제는 모두 이세상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내 두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여기에 잠시 터잡고 사셨던 어머니는 지난 6월에 돌아가셨고 철도에 근무하셨던 아버지는 7년전에 이미 세상을 하직하셨다.
나도 이젠 머리가 희어져버렸다. <뒷동산에 올라>라는 가곡의 노래말이 떠올랐다.
"내 놀던 옛동산에 이제와 다시 서니......." 나는 그 노래를 끝까지 부를 수가 없었다. 가슴이 너무 먹먹해서 그랬던가보다.
옛 동산에 올라
이은상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시인의 허사(虛辭)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베어지고) 없구려
지팡이 도로 짚고 산기슭 돌아서니
어느해 풍우엔지 사태져 무너지고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구료
허망했다.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이다.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우리가 살고있는 이 현실이 사이버 가상공간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던데......
오늘 나는 저 댐부근까지만 갔다가 돌아설 생각이다.
초등학교 4학년때 물에 빠져 죽을뻔했던 사건이 벌어졌던 장소도 저 밑에 있다.
냇가에 그렇게 많았던 왕버들도 이제는 거의 다 사라지고 말았다. 도대체 남아있는게 뭐란 말이지? 얕은 물가에 소복하게 모여살던 모래무지 새끼들도 이제는 다 사라지고 말것이다. 내가 어렸을땐 여기까지 은어가 올라왔다. 낙동강 최상류까지 은어가 올라오던 시절이 있었다면 믿어질까?
산허리를 누비며 시원스레 뻗어나간 도로를 자동차로 달리는 사람들은 여기를 고향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슬픔을 알 수있을까?
나는 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러면서도 괜히 마음이 바빠졌다. 경주로 내려가려면 영주나 안동까지 나가서 기차를 타야만 했기 때문이다.
기차시간을 맞추려면 서둘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래오래 세밀하게 찬찬히 보면서 기억속에 넣어두려는 내 의지가 발걸음을 늦추는 것이 틀림없다.
나는 한번씩은 꼭꼭 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멋지게 감아도는 물길에다가 꼭 댐을 만들었어야 하는 것일까? 멀리 학가산 정상이 보였다. 맑은 날이면 산꼭대기 라디오 송신탑에서 반짝이던 불빛이 보였던 곳이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때인 1962년에 처음으로 라디오를 보았다. 아버지께서 동네 아저씨에게 중고라디오를 사오셨던 그날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산비탈의 나무를 베어낸 곳에 중앙선 터널이 숨겨져 있다가 모습을 슬쩍 드러냈다. 터널 입구가 슬며시 나타났다.
터널 입구도 봉쇄해야 물이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것은 공사관계자들이 알아서 처리할 문제다.
내성천 건너 앞에 보이는 마을이 금광마을이다. 분위기로 보아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네를 떠난듯 하다. 주민들에게는 어쩌면 올해 농사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지나온 꼬부라진 길을 따라 허무함과 적막함이 맴돌고 있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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