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히 시간을 만들었다. 나는 그곳을 찾아 가보기로 했다.
청량리로 올라가는 기차는 경주역에서 9시 15분경에 출발한다. 16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경주역으로 갔다. 나들이할때 자주 애용하는 기차이지만 탈때마다 분위기가 새롭다.
이제는 이 기차역에서도 내릴 이유가 없어졌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괜히 허전해서 지나칠때마다 마음이 헛헛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던 곳이다. 곧 물에 잠길 처지여서 사진으로나마 기록을 남겨놓고 싶어서 찾아가는 것이다. 바로 저 산너머 어딘데.....
내가 살았던 곳은 수몰예정지역에 포함되었다. 유년 시절에 자주가서 놀았던 기차역도 이제는 폐역이 되었고 철로조차 이설되어 버렸다. 무섬마을 뒷자락이 차창에 나타나났다가 빠르게 사라져갔다.
영주역에 도착하니 11시 50분이 되었다. 경주에서 두시간 반이 걸린 것이다.
나는 지하도를 거쳐서 집찰구로 나왔다.
1960년대의 영주역은 이제 꿈속에서나 찾을 수 있다. 얼마전에 꿈속에서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감격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역은 예전의 영주역이 아니다.
나는 영주역 광장에서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혹시 반가운 얼굴이 불쑥 고개를 내밀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설픈 기대감을 품고서 말이다.
그런 만남은 혹시나했지만 역시나였다. 영주역 광장에서 갑자기 아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나는 영주시내버스터미널로 갔다. 터미널은 영주역에서 약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일단 버스운행 시간표부터 찍어두었다. 그래야 오늘 내가 움직이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기때문이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와서 분식집을 찾았다. 시내버스터미널 부근에서 분식집을 찾아 김밥을 샀다. 목적지로 가는 버스는 12시 30분 출발이다.
한 20분 정도만 달리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나는 버스에서 내렸다. 내가 내리고나자 승객이라고는 달랑 한명이 남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충격에 빠졌다. 사방이 다 파헤쳐진 가운데 집들이고 뭐고 다 사라진 곳에는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한두채 남아있는 집을 보자 말로 다할 수 없는 허무감이 밀려들었다.
버스는 종점을 향해 휑하게 내달렸다. 저 버스조차 이제는 이길이 낯설어질 것이다.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할 곳에는 잡초만이 가득했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이지? 이게 정녕 꿈이 아니란 말이지? 작년에도 이와 비슷한 풍경을 목도한바 있지만 올해는 그 충격의 강도가 더 컸다.
아직도 삶의 터전을 벗어나지 못한 집이 두채가량 남아있었다. 여기 이 부근 어디가 친구네 집일텐데.....
문전옥답도 황무지로 변했다.
이 황무지조차도 이제는 물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친구가 면장으로 근무했던 면사무소건물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몇대의 승용차가 대어져 있고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이사를 가지 못한 모양이다.
면장을 지냈던 친구도 이젠 은퇴를 했다. 행정구역과 학구(學區) 대부분이 물속으로 가라앉게 되었으니 그나마 시골에 남아있던 친구들조차 거의 모두가 삶의 터전을 떠났다.
전나무가 우거져있던 산도 모조리 깎여나가고 있었다. 댐이 만들어지면서 생기는 호수 주위를 순환하는 도로공사때문일 것이다.
가슴으로 마구 몰려드는 허전함때문에 먹먹해지고 말았다.
지서가 있던 곳이다. 지서에서 지구대로 바뀌더닌 지금은 파출소로 변신한 모양이다. 이름이 여러가지 모양으로 바뀌긴 했지만 나에게는 시골 지서라는 단어가 더 정감있게 다가오는 말로 남았다.
천만다행으로 파출소도 아직은 제 업무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학교터가 나타났다. 멀리서 봐도 초록색 철망으로 된 담장이 사라지고 없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여기 이장소야말로 내가 6년동안의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그런데 말이다, 학교 건물이 깡그리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사람이 살다가 이런 일도 당할 수 있구나 싶었다.
학교앞 논밭에도 잡초만 무성했다.
교문도 사라지고 없었다. 교문이 없는데 학교건물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내가 밟고 다녔던 운동장도 휑함 그 자체였다. 갑자기 눈물이 솟아올랐다.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마구 솟아올랐던 것이다.
학교건물이 있었던 곳 앞에는 공사용 전봇대 몇개가 가로누워 운동장을 지키고 있었다.
친구들의 재잘거림이야 수십년전에 사라진 것들이지만 많은 후배동문들의 발자취가 남은 이런 운동장조차 이제는 물고기들의 놀이터가 될것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슬폈다.
그래, 저 플라타너스 나무는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있다. 그렇지만 저 나무도 이제는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질식사할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학교 뒷산의 나무들도 제법 깎여 나갔다.
나는 학교 건물이 서있던 곳으로 올랐다. 건물이 뜯겨져 나간 자리에는 옥수수대궁들이 마지막 남은 한해살이의 비애를 안고 시들어가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들이 사시던 사택자리에도 옥수수들이 자라고 있었다.
모두가 꿈이었다. 흘러보낸 세월도 유년시절의 추억도 모두가 헛된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실로 오르던 작은 언덕길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이제는 그것조차도 잡초에 묻혀가고 있었다.
옛기억을 떠올리려고 해도 자그마한 추억나부랭이조차 생각나지 않으니 답답해서 못견딜 지경이 되었다.
나는 포기하고 말았다. 과거에 매달리는 것은 옳은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작은 위안을 삼으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허망했다. 갑자기 가슴과 옆구리 여러곳이 뻥뻥 뚫려져나가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했기에 눕혀진 전봇대에 걸터앉아 김밥 몇조각을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이런데서 갑자기 허기를 느끼는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나도 속물이었으며 하빠리 인생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삼류였으며 구질구질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던 시골뜨기에 지나지 않았다.
어리바리하기 그지없는 못난이가 된 심정으로 학교 여기저기를 훑어보며 나는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어리
버리
'사람살이 > 옛날의 금잔디 Long Long Ago (고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았던 동네가 사라지고 없었다 1 (0) | 2014.09.29 |
---|---|
다녔던 초등학교가 사라지고 없었다 2 (0) | 2014.09.27 |
시골을 다녀오면 허전해진다 (0) | 2014.03.14 |
한지(韓紙) 창호지를 보며 (0) | 2013.11.26 |
목화씨앗을 사두었다 (0) | 2013.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