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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4 중국-복건성:화교의 고향(完)

토루장성 1

by 깜쌤 2014. 5. 22.

 

남계골짜기를 따라달리던 자동차는 어느 순간 도로를 벗어나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1. 진성루 - 토루왕자

2. 진복루 - 토루공주

3. 연향루

4. 환극루

 

위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나타난다. 우리는 1번 지점에서 출발하여 이동을 시작했다. 1번 진성루 부근에서 우리는 숙박을 했었다. 지금은 자동차를 빌려 2번 진복루와, 3번 연향루, 4번 환극루를 구경한 뒤 화살표 방향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토루장성을 보기위해 산으로 올라간다.

 

 

위에 전망대가 있는 모양이다.

 

 

계단을 올라가자 외벽을 노란색으로 칠한 3층짜리 전망대가 나타났다.

 

 

어째 좀 싸구려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계단을 오르자 아래를 전망할수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동서로 좁은 계곡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여기는 좁고 긴 계곡이어서 농토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러니 산 중턱까지 다랑논을 일구었다.

 

 

이제 이 남계계곡의 전모를 본 셈이다. 우리는 저 아래에서부터 도로를 따라올라온 것이다.

 

 

골짜기를 따라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셈인데 자세히 보면 여기저기에 대형 토루가 몇개씩 몰려있음을 볼 수 있다.

 

 

ㄷ자형식으로 지은 토루가 있는가하면 ㅁ자모습으로 지은 토루도 보인다.

 

 

물론 원형토루도 있다.

 

 

나는 얼기설기 엮어진듯이 보이는 저 다랑논에서 슬픔을 느꼈다. 중국인들은 저런 논밭을 제전이라고 부른다.

 

 

산골짜기 동네라고 해서 우습게 여기면 곤란하다. 집들이 하나같이 대형이기 때문이다.

 

 

몇개씩 연결된 토루가 보이는가? 그러니 토루장성이라고 부른다.

 

 

마삼보라는 사나이를 알지 싶다. 단순히 마삼보라고 하면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정화라고 하면 쉽게 알아차리는 분들이 많으리라. 한자로는 鄭和라고 쓴다. 신장이 2.1미터가 넘었다고하니 체구 하나는 엄청나게 우람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대함대를 거느리고 중국을 출발하여 아프리카 동해안과 아라비아 및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를 몇차례나 다녀왔다.

 

 

그는 명나라 시대 사람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가지고 견주어본다면 고려 말기에서 조선 중기에 해당되는 시기다. 명태조 주원장을 우리는 홍무제(洪武帝)라고 무른다. 추악한 행동으로 소문난 홍무제는 자기 아들에게 황제자리를 물려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아들이 죽고 만다.

 

 

그의 아들이 죽고나자 황제의 자리는 손자에게 돌아가는데 그가 건문제(建文帝)다. 건문제는 황제자리를 노린 넷째 삼촌 주체와의 투쟁에서 패하고 해외로 탈출했다. 어떤 이들은 군중 속으로 잠적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로부터 얼마 뒤  조선에서도 권력투쟁이 발생하는데 바로 세조와 단종간의 다툼이었다.

 

 

양쪽 다 삼촌이 조카를 임금자리에서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체가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되는데 그가 바로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다. 영락제는 조카였던 2대 황제 건문제의 주검을 확인하고 싶어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주체가 황제로 등극하는 과정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정화라는 사람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마화였다. 중국 남쪽 운남성의 회족 출신으로 1371년에 태어났다.

 

 

소문에 의하면 건문제는 자기 할아버지 명나라 태조인 홍무제 주원장이 남겨준 승려복장과 도구를 가지고 대궐을 빠져나갔다고도 했다. 조카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영락제는 거대한 배를 건조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에게로 도망을 갔을지도 모르는 조카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진실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원정대는 어마어마한 선단을 구성한 뒤 굉장한 선물과 병력을 가득싣고 대항해에 오른다. 이 함대의 총사령관이 정화(=마화, 마삼보)다. 그는 이슬람교도(=회교도)였다. 그의 아버지와 조부도 독실한 회교도여서 당시 중국인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까지 성지 순례를 다녀온 사람들이었다.

 

 

그가 처음 대함대를 이끌고 중국을 떠난 해가 서기 1405년이다. 조선 건국이 1392년의 일이니 대강 그 시기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지금부터 약 610년 전의 사건이다. 1차 항해 당시 출발한 배의 숫자만 해도 317척, 승선인원 27,870명이었다고 전해진다. 상상을 넘어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정화 함대의 주력을 이루었던 배를 보선이라고 불렀는데 작은 배의 길이가 90미터 정도, 폭이 45미터 정도였다고 한다. 보선 가운데 큰 배는 길이 130미터, 포기 55미터 정도였다니 할말을 잊게 만든다. 배를 건조한 곳은 남경 부근 용강관용강선창이라고 전해진다. 보선만 총 62척을 건조했는데 한척당 약 500여명 정도가 탑승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의 국력이 그정도였다. 정화가 이끈 대함대에서 가장 작은 배는 식수운반용이었는데 길이가 17미터 정도였다고 한다. 함대는 거의 모두가 흰색을 칠했다. 그런 배들이 바다를 메웠으니 처음 본 외국인들은 기가 질렸을 것이다.  

 

 

중국배들은 둥근 물통에다가 자성을 띈 바늘을 띄운 나침반을 사용해다고 전한다. 이런 기술들은 모두 당시로서는 최첨단을 달리던 고급기술이었다. 정화의 대함대를 구성한 배들은 방수구획까지 갖추었기에 배 밑에 물이 밀려들어와도 칸을 다 질러 두었으니 쉽게 침몰하지 않도록 했다는 말이 된다.   

 

 

승선 인원가운데는 주술사와 병을 치료하는 의원, 통역관, 고급장교와 하급군인, 고위직 공무원에 해당하는 내시들까지 태웠다니 상상을 넘어서는 조직이 동원된 셈이었다. 요즘같으면 이런 행위는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행위가 되겠으나 당시로서는 그렇게 비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중국이라는 나라의 어마어마한 위세에 질린 많은 나라들은 앞을 다투어 사신을 파견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공물을 바쳤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서 동남아시아에서 세력을 넓혀가고 있던 화교의 존재를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정화의 대함대는 동남아시아의 많은 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인도의 서부해안도시에서도 화교의 존재를 발견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전해진다. 당시에 이미 항해일지를 작성했으니 역사적 사실로 남아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자바나 수마트라, 보르네오 섬에서는 화교들의 분쟁에 끼어들어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화교들의 영향력은 엄청나서 정화의 대함대가 항해를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화교들의 본거지가 복건성이나 절강성, 그리고 광동성이다. 나는 작년에 절강성을 뒤져보았고 올해는 복건성을 대강 훑고 있는 중이다.

 

 

화교라는게 도대체 무엇인지 아직도 정확한 감은 잡히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의 저력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전망대에 서서 토루장성을 보며 나는 그들의 위대함을 느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