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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야생화, 맛/경주 돌아보기 Gyeong Ju 1 (完)

박목월선생 생가(生家)를 찾아나섰다 3

by 깜쌤 2013. 9. 12.

 

디딜방앗간을 나온 나는 본채를 구경해보기로 했다. 본채는 부엌 한칸과 큰방 작은방으로 이루어졌다.

 

 

방은 작았다. 어렸을때 흔히 본 옛날 초가의 방과 크기가 거의 비슷했다.

 

 

 단출한 살림살이였지만 방안에 들어있는 가구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작은방이다.

 

 

큰방의 모습이다. 단정하게 놓인 다듬이돌과 다듬이방망이가 눈길을 끌었다. 왼쪽에 보이는 가구는 2층장이지 싶다. 본채의 큰방은 보통 여자들 차지다. 남자들은 사랑채를 썼다.

 

 

대들보와 서까래가 다 드러나있었다. 시렁에 올려둔 낡은 가죽가방 하나와 싸리나무로 만들었을것같은 함과 나무로 만든 함지가 옛 내음새를 구수하게 풍겨주었다. 

 

 

안방으로 연결된 부엌의 모습이다. 살림살이가 꽤나 간소하다.

 

 

제일 안쪽에 있는 것은 뒤주이리라. 앞에 보이는 것은 찬장이 아닐까 싶다.

 

 

안방과 부엌을 연결하는 문이 부엌문이다.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여 이 문을 통해 쉽게 방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부엌문을 통해 본 안방의 모습이다. 안방과 작은방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랬다. 예전에는  이런 구조로 된 집들이 참 많았다. 화장대와 면경이 보인다.

 

 

부엌에 달아둔 시렁 위에 밥상을 비롯하여 채반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제사를 지낼때나 명절이 되면 소쿠리와 채반을 꺼내 먼지와 거미줄을 털고 그 위에 깨끗한 짚을 깔고는 부침개를 부쳐 펼쳐두기도 했다.

 

 

부엌옆에는 장독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장독대 앞에 핀 노란 채송화가 우리 어머니들의 한과 슬픔을 나타내듯이 수줍은듯 다소곳이 피어있었다. 채송화 꽃송이마다 애잔함이 가득 스며들었다. 

 

 

나는 사랑채로 가보았다.

 

 

부엌 옆 장독대에 서서 담너머를 내다보면 시낭송장과 화장실이 바로 앞에 다가와 보였다.

 

 

앞마당 건너 디딜방앗간이 보였고.....

 

 

사랑방이 제법 참했다. 목월선생의 사랑채가 원래 이랬는지는 모르지만 초가의 사랑채가 이정도였으면 대단한 축에 든다. 내가 워낙 없는 집에서 커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사랑채는 주로 남자들 공간이어서 손님이 오면 그쪽으로 모셨다. 여자 손님이 오면 당연히 안채로 모신다.

 

 

사랑채에 딸린 부엌에는 소여물통까지 가져다 놓았다. 북부지방에서는 겨울에 부엌이나 집안 공간에 소를 들여놓기도 했기에 그럴 수 있었지만 경주같이 따뜻한 남쪽지방에서 사랑채 부엌에 여물통을 가져놓는 것은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 여물통 밑에는 소여물을 장만하기 위한 작두도 보였다.

 

 

목월선생의 생가에서 선생이 쓰셨던 유물은 과연 어느 정도나 남아있는 것일까? 실제 선생이 사용했던 물품들은 동리목월기념관에 비치되어 있는게 다가 아닐까? 복원도 좋지만 너무 인위적이고 작위적이면 가치가 떨어져 버린다.

 

 

사랑채 부엌 바깥에 뒤간이 붙어있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화장실이다. 뒷간 앞에는 속이 보이지 않도록 발을 치기도 하고 거적대기를 달아놓기도 했다.

 

 

왜그런지 목월선생의 생가에는 잔잔한 감동이 없었다.

 

 

인위적이라는 느낌만 가득했다. 선생의 체취와 문학적인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시설이 필요한 것아닐까? 규모만 크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작아도 실제와 가깝게 하는 것이 복원이 지니는 의미이고 가치일 것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정도라면 성공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쓰고 수고한 분들에게는 정말 송구스런 말로 들리겠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니 용서하기 바란다. 

 

 

디딜방앗간 옆쪽으로 있는 담장에 박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박을 사랑채 지붕쪽으로 올렸더라면 더 정감이 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담장쪽에는 호박을 심었더라면 나을뻔 했다. 이제 처음이니까 앞으로는 더 멋진 조화를 이루어 낼것이라 믿는다.

 

 

하얀 박꽃이 지고난 뒤에 작은 박이 열려 한창 자라고 있었다. 요즘은 이엉을 엮을 줄 아는 분도 드물지 싶다.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목월선생의 시들을 꽃에 비유하자면 박꽃이 아닐까 싶다. 선생이 지닌 이미지와 맞아떨어지는 식물이 박이지 싶다.

 

 

나는 다시 마당으로 나와 주위를 살폈다.

 

 

논벌 끝에는 단석산 줄기가 이어져 있었다.

 

 

선생의 생가앞 벌판으로는 포항으로 가는 고속철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지도를 첨부했으니 정확한 위치가 궁금한 분들은 확인해보기 바란다.

 

 

나는 아쉬움과 허전함을 남겨두고 경주로 돌아가기 위해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광복절임에도 불구하고 나와서 근무중이던 여직원의 친절과 마음씀씀이가 고맙기만 했다.

 

 

돌아올때는 갔던 그길을 그대로 밟아왔다.

 

 

워낙 햇살이 뜨거워서 그런지 강변 산책로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