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한쪽을 흐르는 실개천을 따라 쭉 올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정원석으로 축대를 쌓은 곳이 보였다. 다온 것이다.
축대를 돌자 곧 생가 입구가 보였다. 나는 자전거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여름 한가운데 끼인 휴일인데다가 한낮이어서 그런지 관리자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첫눈에 느낀 인상은 제법 거창(?)하다는 것이었다. 여러가지 문학행사를 하기 위해서 이 정도의 공간은 확보해두어야 할 필요성은 있지만 글쎄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와집 두채사이로 열린 공간으로 들어섰다. 알고보니 오른쪽은 관리사무소였고 왼쪽은 화장실이었다.
회벽을 곱게 바른 기와집이 나에게 주는 이미지는 단정함이다. 더군다나 새집이 아니던가?
화장실 앞으로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앉아서 시 낭독을 듣거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의자들이 줄을 맞추어 정렬해있었다.
알고보니 여기는 시낭송장이었다. 기념공간을 만들때 활용도를 잘 생각해서 만들면 좋을텐데..... 불국사 입구에 동리목월문학관이 있길래 해보는 소리다.
나는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돌이 박힌 낮은 흙담장 위에는 짚으로 이어올린 이엉이 보였다. 그런데 말이다, 정겨움으로 다가와야할 초가가 왜 그리도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이런 모양의 초가를 보는 것은 드문 일 아니던가? 나는 은근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경주지방의 전통 초가가 이랬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상식과는 약간 동떨어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이쯤에서 근대에 찍은 경주시가지의 모습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경주시내에서 행사를 할때 자주 등장하는 옛사진을 사진찍은 것이다. 이 사진은 봉황대 부근의 모습을 찍은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2012년 11월에 찍은 봉황대의 모습이다. 나무의 배치도가 비슷하지 않는가?
지금은 봉황대 부근을 말끔하게 정비해서 멋진 공원이 되어있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전통초가는 목월생가터에 복원해 놓은 모습과는 차이가 난다.
시에서 복원한 사업이니 어련히 알아서 했으랴마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지면 복원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것이다.
여기는 아마도 오늘날의 대릉원 안쪽 구역이 아닐까싶은데 어쨌거나간에 전통 초가와 목월생가와는 모습에서 차이가 난다는 느낌은 얼른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양동민속마을의 초가를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굳이 비슷한 모습을 지닌 집을 찾자면 이집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제 약간 위안이 된다. 나는 찾는 김에 내 컴퓨터 속에 들어있는 전국의 민속마을 사진을 다 뒤져보기로 했다. 그렇게해서 찾은 사진이 바로 아래 사진이다.
흙과 돌을 이용해 지은 아래채의 모습이다. 경주 양동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제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목월선생의 일생에 대해서는 여기에 새로 자세히 소개할 여유가 없으므로 위에 올려둔 글상자안의 내용을 참고로 하기 바란다. 내용이나 제목을 클릭하면 자세한 자료가 뜰 것이다. 2012년에 동리목월 문학관에 직접 가보고 쓴 글이니 사진자료나 내용은 신뢰성이 높다.
복원한 생가를 한눈에 파악하고 싶다면 안내도를 볼 일이다.
생가 담장부근에 우물이 보였다.
우물 모양도 지역에 따라 달랐으니 함부로 맞다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제 모퉁이를 돌면 초가로 들어가는 사립문이 나타난다.
담장 한가운데 사립문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자꾸만 어색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무엇때문에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일까?
사립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행세깨나 한다는 사람들은 고래등같은 기와집에 살며 대문도 멋지게 해달았지만 일반 서민들은 흙담장 한쪽에 싸리나무나 대나무로 사립문을 만들어 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당 오른쪽에 사랑채가 보였다.
마주 보이는 건물이 본채다.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어색함 때문에 선뜻 들어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금 자라나는 세대들은 초가에 대한 경험이 드물터이니 자기 눈에 보이는대로 있는대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목월선생이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냈던 집의 본채는 저런 모습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해보았다.
전통 사립문의 모습은 위와 같은 모습이다. 영주 무섬마을에서 2008년 1월에 찍은 사진이다.
이런 초가에는 사람이 실제로 살고 있으니 훨씬 더 정감이 간다.
내 눈에는 사랑채가 훨씬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사립문에서 왼쪽, 그러니까 우물이 있는 쪽이 디딜방앗간이다.
발로 디뎌서 방아를 찧는다고 해서 디딜방아인 것이다.
나는 디딜방앗간으로 들어갔다. 경주전통의 디딜방앗간은 타지방과 모습이 조금 다른 것일까? 여기에서 다시 영주지방의 디딜방앗간을 한번 보기로 하자.
사랑채에 붙은 공간에 디딜방아와 평상이 보인다. 위의 사진도 무섬마을에서 찍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고급스런 디딜방앗간을 지닌 집은 드물었다. 구조 자체도 어색하기만 하고..... 양가닥으로 갈라진 디딜방아의 끝부분을 발로 힘껏 밟아서 공이(방아대가리)를 들어올려놓고 사진을 찍었다.
왼쪽에는 멍석이 매달려 있었다. 멍석을 보는 것이 얼마만이던가? 앞에 세워진 지게에는 발채가 들어있었다. 싸리나무나 대나무로 만드는 발채안에는 거름이나 여러가지 물건을 담는다. 발채가 들어있는 지게를 바지게라고 한다.
디딜방앗간을 둘러싼 담장에는 박넝쿨이 뻗어가고 있었다.
맷돌과 지게, 그리고 나무로 만든 절구.....
이제는 하나씩 사라져가는 풍물들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제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리라. 알지못하는 것이니 기억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멍석이 매달린 틈사이로 목월 생가의 사랑채가 보였다. 목월선생도 유년시절에 방앗간 출입을 해보았을까? 나는 대학을 다닐때까지도 어머니와 함께 고추를 빻기위해 동네의 디딜방앗간을 드나들었다. 매케한 고추내음이 아직도 코끝을 간지럽히는 듯한데.....
디딜방아를 밟는 부분이 갈라져 있는 것은 두사람이 한꺼번에 같이 일할 수 있다는 말이다.
벽체에 박힌 돌이 너무 단정하게 곧이곧대로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기사 기술이 발달한 21세기에 복원한 것이니 이해는 하지만 약간은 떨떠름한 기분이다.
그런 기분과는 상관없이 뜨거운 햇살이 사정없이 내리쪼이고 있었다. 나는 본채를 보기 위해 마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리
버리
'경주, 야생화, 맛 > 경주 돌아보기 Gyeong Ju 1 (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주에 커피길이 있다 (0) | 2013.09.17 |
---|---|
박목월선생 생가(生家)를 찾아나섰다 3 (0) | 2013.09.12 |
박목월선생 생가(生家)를 찾아나섰다 1 (0) | 2013.09.10 |
경주 시내에 거대한 메밀밭이 있다 (0) | 2013.09.08 |
경주 남산 둘레길을 자전거로 돌아볼 수도 있다 2 (0) | 2013.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