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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교육, 초등교육/교육단상(敎育短想)

교육을 <악마의 제도>로 만드는 자가 누구인가?

by 깜쌤 2013. 8. 7.

 

선생을 수십년 해보면서 느낀 것이 많은데 그 중의 하나가 국가백년지대계라고 하는 교육을, 정권을 잡은 자들이 자기들 입맛에 따라 마음대로 재단하거나 활용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 말이니까 내가 한창 젊었을때의 일이다. <10월 유신>의 당위성을 주민들에게 홍보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라는 식으로 선생들에게 상부기관의 지시가 내려온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피끓던 청춘시절이라 당연히 주민홍보에 나가지는 않았고 교과서에 실린 유신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내용이 있는 부분은 가르치지를 않았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는 너희들이 크면 진실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곁들이면서 그냥 넘어갔다.

 

 

 

나는 평생동안 6학년을 30여년간 가르쳤으니 교과서 내용의 변천과정은 대강 기억한다. 국어과와 사회과의 역사에 관한 어떤 부분은 정권이 바뀔때마다 자기들 입맛에 따라 재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학년을 오래 가르쳤더니 그런 것을 저절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육행정이나 역사교육을 자기 입맛대로 끌고나가는 몇몇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구역질이 날 정도로 혐오스러움을 느낀다.

 

진보정권에서 교육부장관을 지냈고 나중에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라는 국무총리를 지냈던 이모씨의 처사를 보면 특히 그랬다. 아이들이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여 한가지만 잘하면 원하는 대학에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설익은 정책을 내어놓더니만 나중에는 흐지부지 되는 모습을 보며 적잖이 실망하기도 했다.

 

그는 경험이 풍부한 교사들을 무용지물로 여겨 모욕적인 언사를 수시로 퍼부어댔다. 그 바람에 많은 수의 원로교사들이 평생을 몸바쳐왔던 교직을 떠나갔다. 물론 나중에는 교사충원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여 정부당국에서 곤욕을 치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MB정권때의 교육정책도 그랬다. 인성교육보다는 아이들과 학교를 성적순으로 줄세우기에 바빴던 학력위주의 교육정책을 5년내내 밀어부칠 때는 내가 선생을 왜 해야하는지 심각하게 회의를 느끼기도 했다.

 

나는 초등학교 아이들에게는 누가 뭐라고 해도 다양한 경험을 통한 인성교육이 우선이라는 소신을 가지고 있다. 경험이 전부 다는 아니지만 현장에서 수십년을 가르쳐보고 제자들이 사회에 나아가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나서 깨닫게 된 사실이다.  

 

 

국어 영어 수학은 조금 모자라도 자기가 지닌 특기를 살려 인생을 멋지게 개척해나가는 아이들도 많았다. 세월이 지나고 보면 그런 아이들이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공부를 제법 한 아이들은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보다 아무래도 좋은 대학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아이들의 끝을 보면 거의 기업체에 들어가있거나 교사 아니면 공무원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기업체에 근무하는 분들이나 공무원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기 바란다.  

 

내가 아는 어떤 아이는 악기연주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말이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악기연주에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악기연주라고 하는 분야는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아이 스스로도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아이의 아버지가 교회 성가대 지휘자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으므로 아이도 음악을 좋아하는 경우였는데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중학교때는 호른같은 관악기를 불기도 하더니 드디어 바이올린 연주로 방향을 잡은 것 같았다. 시골동네에 사는 아이라 좋은 스승을 만나기가 어려웠는데, 하늘의 도움심을 입었는지 기적같이 뛰어난 연주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기 시작했다. 

 

타고난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일취월장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예고에 진학하면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기로 마음먹고 그 길로 나아갔다. 국영수를 강조하는 교육을 받기만 했다면 이런 아이들의 재능은 그냥 묻혀버리고 말 처지였다.

 

 

사실 말이지 악기를 전공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재능 더하기 돈싸움이기도 하다. 레슨비가 오죽이나 비싼가 말이다. 아이의 부모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인데 비싼 레슨비를 감당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는 스스로 자기 길을 개척해나가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뒤져 정명훈 음악캠프에 참가신청을 했는데 거뜬히 합격을 했다. 서류도 자기가 직접 만들어서 제출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실 경주출신의 시골아이가 정명훈 음악캠프 같은데 합격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서류심사에 통과를 하고 서울에 올라가서 심사위원들 앞에서 오디션을 보았는데 거기에서도 통과를 했다. 8월 19일에는 서울에 가서 캠프에 참가하여 실기연수를 받을 모양이다.

  

 

나는 지난 7월에 이 아이가 멘델스존이 작곡한 바이올린 곡을 연주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첼로와 피아노 그리고 바이올린을 전공한 중소도시에 사는 연주자들이 자기들의 드레스까지 빌려주며 아이들을 무대에 세워 연주하는 기회를 마련해준 음악회였는데 끝까지 보고 있으려니 코끝이 찡해져왔다. 

 

국영수만을 강조하는 우리 교육 현실에서 이런 아이가 두각을 나타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직 학력만을 부르짖는 사회에서 이런 아이들이 가진 재능은 그냥 사라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현실이 싫다는 이야기다.  

 

 

정명훈씨가 누구던가? 그가 국어 영어 수학만을 잘해서 세계적인 지휘자가 되었던가? 정명훈이라는 위대한 지휘자 한사람이 선양하는 국위의 가치는 금액으로 환산할 경우 도대체 얼마쯤 되는 것일까?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교육은 죽은 교육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학력제일주의와 학벌제일주의라는 이름하에 신음하는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공무원 시험에 대졸자의 반이상이 매달리는 이따위 사회를 만들어 놓은자들이 도대체 누구인가? 누가 그런 악마의 시스템을 만들어나가는 것인지 따져볼 때가 되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