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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3 중국-절강성:화려한 남방(完)

악비를 찾아가다 2

by 깜쌤 2013. 5. 17.

 

 

 

중국 역사에서 중세에 해당하는 송나라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대신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아 인민이 전란의 고통속을 살아야했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문(文)을 우대하고 무(武)를 홀대하였던 문치주의 국가 송은 요나라의 압박으로 인해 황하이북의 영토를 요에게 넘겨준 상태에서 국토회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만 예전같지 못했습니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수법에 능통한 중국인들인지라 송은 만주에서 일어난 만주족국가 금나라와 손을 잡고 요를 멸망시킵니다만 이번에는 금의 침입으로 인해 힘들어했습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속에서 중국대륙으로 진출하려했던 금의 세력을 격퇴하는데 전공을 세운 사람이 악비였습니다.

 

송나라는 금의 침입때문에 수도를 양자강 남쪽에 자리잡은 항주로 옮긴 상태에서 저항을 계속했는데 당시 조정에는 금과의 전쟁을 회피하고 금전으로 평화를 유지하려했던 주화주의자인 진회같은 사람이 권력을 잡고 있었던 것이죠.

 

양자강 이남으로 밀려 반쪽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송은 금의 침입을 막아내고 옛날 영토를 회복하려 했던 악비(1103~1142)같은 장수를 우대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모함을 하여 처단하고 맙니다. 진회(1090~1155)의 음모에 걸린 악비는 서른 아홉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습니다. 그의 사후에 역사의 평가는 엇갈리고 맙니다. 진회는 매국노가 되고 악비는 충신의 표본이 됨과 동시에 구국영웅으로 민간에게 숭상받게 된 것입니다.

 

위의 사진은 진회의 부인 왕씨의 모습입니다. 남송 시대 재상을 지낸 진회의 부인으로서 온갖 영화를 다 누렸겠지만 사후에는 악비의 무덤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모습으로 앉아있는 것이죠. 뒷면을 보면 왕씨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악비의 죽음에 진회의 부인 왕씨도 꽤를 낸것으로 역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철책에 갇힌 또한 사람의 인물이 바로 진회입니다. 악비를 죽음으로 몰아간 인물로 지목된 그는 인민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 두사람의 조각상에 침을 뱉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 지저분했다고 하는데 요즘은 침을 뱉지 못하게 해서 그나마 이정도로 깔끔해진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역사를 보는 중국인들의 감정과 생각을 약간은 짐작할 수 있을 것같기도 합니다.

 

 

철로 만든 무릎꿇은 인물상이라는 의미를 담은 철인궤상이라는 제목으로 된 안내판이 그 옆에 서있었습니다. 이미 명나라시대때부터 악비의 무덤앞에는 이런 식의 조형물을 설치해두었던 모양인데 현재 보이는 이 조각상은 1979년에 새로 설치한 것이라는군요.

 

 

진회부부의 수모를 보며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치욕적인 것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고개를 돌려 반대편으로 눈길을 주면 좌우로 늘어선 문인상과 무인상의 호위를 받으며 누워있는 단정한 모습의 봉분 두개가 눈에 뜨입니다.

 

 

인물상 앞쪽으로는 짐승들의 모습도 함께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서있는 위치에서 뒤를 돌아다본 모습이죠.

 

 

왼쪽에 약간 더 크게 보이는 무덤이 악비의 무덤입니다.

 

 

악비가 조직했던 군대를 악가군(岳家軍)이라고 불렀는데 상승(常勝)군대로 이름이 높았다고 합니다. 악비 혼자서만 금나라 군대에 대항한 것은 아니어서 한세충이나 장준같은 인물의 활약상도 대단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다만 악비는 그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중국인들로부터 더 많은 동정을 얻은 셈이 됩니다.

 

 

악비가 남긴 글씨를 보면 그가 서예에도 상당한 일가견을 가져 대단한 명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학문에도 상당한 소양을 지녓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악비가 이렇게 흠모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소지주 계층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능력으로 장군의 지위까지 올랐던 것도 한몫을 했습니다.

 

그는 병졸로 출발해서 능력을 발휘하여 장군이 된 것이죠. 평민출신으로서 군대를 통솔하는 지위에이르도록 신분상승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사병과 똑같이 숙식을 했다니 대단한 의지를 지녔던 인물임을 알 수있습니다. 패장이 되긴 했습니다만 공화국 로마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한니발도 숙식은 일반병사와 거의 비슷하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악비의 무덤입니다. 동북공정의 영향으로 인해 최근에는 악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은 한족 중심의 단일민족국가가 아니라 다민족이 연합한 통일국가라는 입장에서 악비를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악비는 같은 나라에 속한 인민을 처단한 반역자가 되는 셈이죠.

 

 

악비 무덤의 오른쪽에 자리잡은 무덤은 악비의 큰아들인 악운의 묘입니다. 아들 악운도 함께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기 1142년 1월 28일의 일로서 당시 악운의 나이는 22세였다고 합니다.

 

 

 

악비의 네째 다섯째 아들은 나중에 함경도 지방으로 이주하여살았고 그들의 후손 가운데 이지란(李之蘭)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나중에 청해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지란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 바 있습니다. 

 

 

악비의 무덤에서 뒤를 돌아다보면 문 왼쪽에 무릎을 꿇고앉은 진회부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역사평가의 무서움을 안고 돌아나왔습니다.

 

 

우리는 옆문으로 나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악비묘 뒤로 뻗어있는 산봉우리들이 보석산자락이므로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지름길을 찾았던 것이죠.

 

 

악비사당 속에 있는 연못에는 금붕어들이 가득했습니다.

 

 

악비기념관은 건물만 보고 돌아나왔습니다.

 

 

나라와 국가, 그리고 민족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잠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21세기에는 민족국가라는 개념이 흐려질 것이라는 분석이 있기도 합니다만 중국의 현실을 보면 그런것 같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옆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산으로 오르기 위해서입니다.  

 

 

악비묘 옆으로 난 길은 호젓했습니다.

 

 

군데군데 들어가볼만한 기념관도 존재하더군요. 워낙 중국역사에 어두운지라 어지간한 인물은 쉽게 그 존재가치를 알아차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길가에서 옛날 우물을 발견했습니다. 밤에는 잘못하다가 빠질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농가곁을 지나는데 깃털벗긴 닭들을 매달아둔 모습을 보았습니다. 돼지를 잡아 말리는 모습을 보기는 했어도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닭뿐만 아니라 오리도 함께 매달려 있었습니다.

 

 

산밑에 자리잡은 이런 동네는 고요하지 그지없을 것 같습니다.

 

 

동네를 벗어나자 드디어 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서도 산불조심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도를 보고 우리 위치를 대강 파악해두었습니다. 보숙탑까지는 약 2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거리를 확인했으니 이제는 천천히 걷기만 하면 됩니다.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이 길가에 앉아있었습니다.

 

 

누가 타고온 오토바이일까요?

 

 

산속이라 해도 험준하지 않아서 그런지 여러가지 시설들이 숨어있었습니다.

 

 

갈림길에서 우리는 직감적으로 서호방향으로 틀어서 걸었습니다.

 

 

천천히 산길을 걸어올랐습니다. 모든 길을 돌로 포장해두어서 걷기가 편했습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