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배낭여행기/13 중국-절강성:화려한 남방(完)

고산에는 청나라 황제들의 행궁터가 있었다

by 깜쌤 2013. 5. 14.

 

누외루 식당을 지나자 이번에는 청행궁유지가 나타났습니다.

 

 

황제나 왕은 궁궐에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한번씩 나들이를 할때도 있는 법입니다. 왕이나 황제가 지방행차에 나서서 머무는 곳을 행궁(行宮)이라합니다. 항주 서호 고산에 청나라 황실에서 사용했던 행궁터가 남아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항주에서는 모든 박물관과 일부 유적지에는 무료입장이 가능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행궁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돌사자가 주위를 압도하는 자세로 앉아있었습니다. 돌사자 뒤 담벼락 부근에는 기묘한 모습을 가진 나무가 한그루씩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안내판을 대강 훑어보고 들어갑니다.

 

 

이 행궁은 청나라의 강희제 44년, 그러니까 서기 1705년부터 공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입구 왼쪽에는 편의점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항주의 관광시설은 중국 그 어느 지방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안쪽으로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뻗은 통로 끝머리에 보이는 붉은 글자가 바로 고산(孤山)이라는 글자입니다.

 

 

청나라 황실에서 만든 궁궐터였으니 모든 시설이 호화로웠을 것은 기본상식아니겠습니까?

 

 

이제는 거의 파괴된 시설이지만 그런대로 흔적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참으로 가상해보입니다. 청나라 말기에 홍수전이 이끄는 태평천국의 이 일어났을때 항주와 소주도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청나라 행궁터가 그때 어떤 식으로 파괴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여기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기둥을 세운 주춧돌인가봅니다.

 

 

구름과 용을 새긴 아름다운 흰색 대리석으로 주춧돌을 삼을 정도였으면 행궁의 위용과 장대함과 섬세함이 정말 대단했을 것입니다. 

 

 

주춧돌이 이정도였으니 그 윗부분을 차지한 건물은 쉽게 상상이 됩니다. 

 

 

 

청행궁유지 너머로는 박물관과 다른 시설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박물관도 한때는 행궁터 속에 포함된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이 건축물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요? 행궁안에 자리잡은 라마교 사원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산이라는 글씨가 보이는 벽 양쪽으로 위로 올라가는 길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갔더니 한쪽 밑으로 또다른 멋진 장소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황실의 행궁시설이 뭐가 이렇게 간단한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죠.

 

 

날아갈듯 날렵하게 하늘로 치솟은 처마곡선이 아름다운 정자가 숨어있기도 했습니다.

 

 

현판이 붙어있었습니다만 가운데 글자는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 아래로 보이는 정자에서는 어떤 양반이 악기를 연주하는듯이 보였습니다.

 

 

정자를 둘러싼 작은 못이 아름답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입니다만 저월천이라는 못이었습니다.

 

 

나는 그쪽으로 내려가보았습니다.

 

 

다리를 놓아도 단순하게 직선으로 만들지않고 살짝 곡을 주어서 구부러지게 한 것이 묘한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저월천이라.....  건륭제는 이 곳을 행궁팔경(行宮八景)가운데 최고라고 여긴듯 합니다.

 

 

운치가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행궁안에는 태호석이 보였습니다. 확실히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기암괴석은 우리와는 감각을 약간 달리하는듯 합니다. 고산 정상부근에는 아름다운 길들이 사방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내려왔습니다.

 

 

행궁을 나오면 앞쪽으로는 서호가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행궁 바로 옆이 절강성박물관입니다.

 

 

여기는 일년내내 무료입장이 가능한 곳입니다. 엄청난 유물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우리가 갔을때는 건물 대부분이 수리중이었습니다.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릅니다. 나그네의 마음을 달래주려는듯 붉은 동백이 꽃을 한창 피워내고 있엇습니다.

 

 

박물관도 원래는 행궁의 일부였다고 합니다. 건륭제시절 편찬한 사고전서라는 책을 보관했던 장소인 문란각도 현재는 박물관에서 전시실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 여행에서 그 장소를 확인못한 것이 나에게는 후회덩어리로 남아있습니다.

 

사고전서는 청나라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건륭황제시절에 편찬된 총서(叢書)입니다. 절강성박물관 에서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는 문란각 건물이 한때는 사고전서를 보관했던 강남의 세군데 장소 가운데 하나였으니 예사일이 아닌 것이죠. 문란각에 보관되었다던 사고전서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아주 귀중한 자료를 찾았기에 소개해드립니다. 글의 출처는 글상자 끝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문란각본: 문란각 사고전서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함풍연간, 태평군이 들이닥치면서 진강과 양주의 장서각은 장서각과 사고전서가 모조리 불에 타버린다. 항주 장서각은 어떻게 보존될 수 있었던가? 1861년, 태평군이 항주를 함락시킨다. 문란각이 훼손되고, 책은 민간으로 흘러들어간다. 장서가인 정신(丁申), 정병(丁丙) 형제는 사람을 시켜 매일 길거리에서 흩어진 책을 구해모으며, 합게 8,689책을 사모으게 된다. 이는 문란각본의 1/4에 상당한다. 문란각본은 불완전하게 되었는데, 어떡할 것인가? 새로 만들기로 하였다. 새로 베껴써서 만드는데, 7년이 걸렸다. 절강순무 담종린의 지원하에 이를 완성할 수 있었다. 1882년, 문란각이 다시 재건된다. 정씨형제는 보완한 사고전서를 문란각에 돌려준다. 문란각본은 이후 "을유보초(乙酉補抄)", "계해보초(癸亥補抄)"를 거쳐 완벽한 모습을 다시 갖추게 된다. 항전시기에는 서쪽으로 옮겼다. 먼저 귀양으로 갔다가 나중에 중경으로 간다. 항전승리후에 다시 돌아와서 오늘에 이른다. 현재는 절강성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도서관안의 원본은 사람들이 볼 수 없다. 영인본은 빌려서 볼 수 있다.

 

출처 :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2527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위의 주소를 눌러보시기 바랍니다. 주인어른 허락없이 가져온 글이어서 죄송하기 그지 없습니다. 너그러운 용서를 구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현대화가들의 그림 몇점 뿐이었습니다.

 

 

서둘러서 박물관을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다행스럽게도 호반에서 코스타 커피가게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커피 가게가 전통 중국식건물이니 더 호기심이 당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건물 자체가 호반에 붙어있으니 테이블 몇개는 아예 호수곁으로 바짝 다가앉은 모양이 되었습니다.

 

 

야외의 좌석을 차지하기에는 약간 쌀쌀한듯 해서 우리는 실내로 들어갔습니다.

 

 

코스타 커피점의 잔받침은 아주 특이했습니다. 잔이 한쪽으로 살짝 치우쳐서 놓여지도록 되어 있더군요.

 

 

나는 아메리카노를 시켰습니다.

 

 

커피 석잔 가격이 81원이었으니까 한사람당 27원 정도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느긋하게 앉아 커피를 즐겼습니다. 급할게 없는지라 휴식을 즐기기에는 그저그만이었습니다.

 

 

천장에 달린 조명시설 하나하나도 허투루 만들어 달아놓은것 같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어느 정도 기운을 되찾은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습니다. 백제를 통해 나가버리면 어제 걸었던 곳을 되밟아야 하므로 우리는 들어왔던 곳으로 돌아나가기로 했습니다.  

 

 

서령교를 건너자말자 우리들은 참으로 묘한 무덤을 하나 찾았는데 비석에 쓰여진 주인공의 이름이 아주 특이했습니다. 소소소(蘇小小)라......  중국식 발음은 다르겠지만 우리식으로 읽으면 소자가 세개나 이어지는 이름이어서 흥미를 끌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계속하겠습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