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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3 중국-절강성:화려한 남방(完)

악비를 찾아가다 1

by 깜쌤 2013. 5. 16.

 

소소소(蘇小小)의 무덤이라는데.....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게 없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백과사전에도 등장하지 않았으므로 할 수없이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해보아야했습니다.

 

 

워낙 부정확한 정보가 판치는 사이버세상인지라 일단은 안내판을 보는게 제일 정확할 것입니다. 그녀는 남제시대(479-502)를 수놓고 간 이름난 기생이었습니다. 그녀의 시도 안내판에 한수가 소개되어있었습니다. 이 정도의 정보만 있어도 바이두에서 검색해보면 그녀에 관한 모든 정보를 충분히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그녀에 관해 조사를 해보았습니다만 시귀를 놓고 만들어진 과정에 대한 설명이 서로 달라서 무엇이 맞는 설명인지를 몰라서 함부로 소개할 처지가 못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녀도 황진이같은 불행한 삶을 살다가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생존기간이 유난히 짧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생몰연대를 가지고 계산을 해보면 스물세살의 나이로 죽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무덤을 지나온 우리들은 항주 최고의 호텔가운데 하나인 샹그릴라호텔 앞을 지나쳐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일단 악비묘의 위치를 확인해두었습니다.

 

 

악왕묘(岳王廟)라는 현판이 달려있는게 보입니다. 여기에서 묘()는 사당을 의미하는 글자입니다. 악비도 이제는 왕으로 추앙을 받는 모양입니다.

 

 

구경도 좋지만 우리는 점심을 먹어야했습니다. 악비사당 앞 건너편 도로에서 우리는 점심을 먹었습니다. 깨끗한 곳을 골라 들어간 것이죠.

 

 

약간 새콤한 맛이 나는 국수를 골랐습니다. 23원짜리 국수인데 제법 맛이 좋았습니다.

 

 

식사중에 중국인 관광객들이 떼거리로 몰려들어와서 떠들기에 적당히 알아서 먹고는 일어섰습니다.

 

 

항주 서호가의 시설들은 하나같이 운치가 넘치도록 지어져있었습니다.

 

 

우리는 도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횡단보도가 조금 멀리 떨어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근에도 커피점이 있는 모양입니다.

 

 

커피점 입구에 놓여진 분재가 제법 수려했습니다.

 

 

도로를 따라 자라는 플라타너스나무들 밑둥치도 세월의 흐름을 나타내는양 엄청 굵었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넌 뒤 우리는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드디어 악왕묘 정문에 올 수 있었습니다.

 

 

여기는 악비를 모신 사당입니다. 악비는 송나라 시대에 활약한 장군으로서 중국인들에게는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여겨지는 인물입니다.

 

 

입장료는 25원이었습니다. 향불을 피우는 향로는 고대의 청동기를 흉내낸듯 합니다.

 

 

나무가지 사이로 보이는 현판 글씨가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가 방금 들어온 문을 되돌아본 모습입니다. 저문 바깥은 도로이고 그 너머가 서호입니다.

 

 

충렬사 건물 위에는 '심소천일'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현판이 걸려있었습니다. 이 경우에 '심천일'로 읽어야할지 '심천일'로 읽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거의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심소천일로 읽는 반면 연변의 해박한 어떤 조선족 지식인은 심조천일로 읽고 있었습니다. 뜻(마음이 하늘의 해같다, 혹은 마음은 해처럼 밝다)은 알겠는데 발음이 문제였습니다. 글씨는 섭검영(葉劍英)의 글씨라고 합니다. 중국 인민해방군 십대원수가운데 하나였던 사람이 섭검영입니다.

 

 

참고로 중화인민공화국,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국 개국에 힘을 쓴 십대원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섭검영(葉劍英), 섭영진(榮臻), 서향전(徐向前), 나영환(羅榮桓), 진의(陳毅),

하룡(賀龍), 유백승(劉伯承), 임표(林彪), 팽덕회(彭德懷)주덕(朱德)

 

 

섭검영(1897~1986)은 모택동이 죽고난 뒤 실권을 휘두르던 모택동의 처인 강청(江淸)과 요문원(姚文元), 장춘교(張春橋), 왕홍문(王洪文)으로 구성된 4인방을 제거할때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당시 군부의 실권자였던 셈이죠. 그와 4인방의 이름은 한때 대중매체에 수없이 오르내렸기에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들어가보는게 좋을듯 했습니다.

 

 

중국인들이 관우와 함께 존경해왔던 무장 악비 장군의 초상입니다. 어느 정도의 정확성을 가진 그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상당한 미남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악비는 남송시대의 인물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로 견주어보자면 고려시대 초중기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악비영정 뒤에 걸린 글씨는 악비의 글씨라고 전합니다. 환아하산(還我河山)이라는 글이라고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제가 가진 한자실력이 일천하기에 처음에는 한글자밖에 읽지를 못했습니다. 금나라 오랑캐에 빼앗긴 산하를 찾아오겠다는 악비의 굳은 의지가 새겨진듯 합니다. 악비의 활약에 대해서는 그의 무덤을 소개할때 따로 이야기할까 합니다.

 

 

충렬사 좌우로는 악비를 모셨던 무장들을 모신 건물이 있었습니다.

 

 

이 잘생긴 사나이는 장헌이라는 인물입니다. 사천성 관중사람으로서 서기 1142년에 죽은 인물입니다.

 

 

악비가 사랑하는 장수였던 장헌은 죽어 열문후로 봉해졌습니다.

 

 

이 사람은 우고(牛皋)라는 인물입니다. 하남성 임여사람이라고 전해집니다. 나중에 그는 진회일당의 마수에 걸려 독살당합니다.

 

 

사람살이가 그렇게 살벌한듯 합니다.

 

 

누구는 나라를 망치려하고 누구를 나라를 일으키려 하고 말입니다.

 

 

나는 악비사당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녀보았습니다.

 

 

중국인들이 악비를 그토록 사랑하는데는 그의 비극적인 일생이 한몫을 한듯 합니다.

 

 

나라를 사랑한 장수로서 기구한 일생을 보냈습니다만 그의 충절은 남아서 세상을 감동시켰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또다른 방향의 평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근에 이루어진 역사조작과정 가운데 하나인 동북공정을 통해 악비가 같은 민족을 학살한 반역자 혹은 시대의 이단아 취급을 당하고 있기도 하니 세상살이가 참 웃기는 일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침내 우리들은 악비묘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 문 안에 악비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악비묘가 있는 구역을 들어서면 제일 처음 만나는 장면이 일반적인 중국인들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그게 과연 무엇일까요?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