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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3 중국-절강성:화려한 남방(完)

항주 서호에서 백거이의 흔적을 찾았다

by 깜쌤 2013. 4. 29.

 

서호 물속에 박힌 저 시설물들은 무엇일까요? 나중에 알고보니 물을 뿜어 올리는 분수구멍들이었습니다. 음악에 맞추어 분수쇼를 하는 시설들이었던 것이죠. 밤에 수상공연을 하는데에도 쓰이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이야트 호텔앞에까지 왔습니다. 이젠 더 호반을 따라 더 북쪽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호반북쪽을 감싸안고 있는 산은 보석산입니다. 보석산을 이루는 작은 산봉우리위에는 보숙탑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멀리서보면 뾰족한 보숙탑의 몸체가 송곳을 세워놓은듯이 보입니다. 가냘픈듯이 보이는 보숙탑이 산봉우리에 자리잡았으니 호수 건너 맞은편에는 그 반대형상의 뚱뚱한 탑이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중국인들은 그런 탑을 하나 만들어놓습니다. 그게 뇌봉탑입니다.

 

 

제가 보기로는 동쪽 호반에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여드는 것 같습니다. 

 

 

동쪽 호반 뒤로 이어지는 거리가 후빈루입니다.

 

 

번화가가 부근에 있어 사람들이 접근하기 쉬운 곳이니 군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길래 우리도 호기심에 젖어 고개를 들이밀었습니다. 이제 막 공연을 시작하려는가 봅니다.

 

 

공연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니 제법 인물이 훤합니다.

 

 

뒤에 보이는 조형물들은 항일기념탑이 아니라면 인민해방군 투쟁사를 강조한 내용을 담은 것이지 싶습니다. 아마 둘중에 하나일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공연하는 팀은 제법 수준이 높은 것 같았습니다. 청중들의 반응이 대단했기때문입니다.

 

 

신명이 넘쳐나는 것 같았습니다.

 

 

중국의 거리공연문화도 그리 만만한 수준은 아닌 것 같더군요.

 

 

우리는 다시 서호로 다가갔습니다.

 

 

여기는 워낙 아름다운 곳이어서 카메라만 들이대면 엽서가 될것 같습니다.

 

 

유람선의 모습도 꽤나 다양한듯 하지만 알고보면 단순합니다.

 

 

이런 유람선들은 단체관광객들을 노리는듯 했습니다.

 

 

나무 둥치를 밑에서부터 감아 올라간 선들은 야간 경관을 위한 조명용 전선이었습니다.

 

 

밤이되면 색다른 분위기를 선보일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북쪽에 자리잡은 보석산 방향으로 꾸준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호수와 나무와 건물들이 어우러져 기막힌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한 십여년 전에 찾아왔더라면 허접한 모습만 보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중국에 첫발을 디딘 것은 서기 2,000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중국에만 일곱번 배낭여행을 하며 돌아다녔습니다만 갈때마다 변화하는 모습이 확실하게 드러나더군요. 

 

 

중국은 배낭여행하기가 쉬운 나라는 아닙니다. 어찌보면 패키지 여행이 훨씬 쉽습니다만 나는 그런  여행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중국 남동부지방과 양자강 부근의 중앙부 지방은 가지않고 아껴두었습니다. 복건성과 광동성도 남겨둔 상태입니다. 거기는 다음 기회에 가볼 생각입니다. 귀주성과 호남성 및 호북성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 각지를 하나하나 훑어보는 것이 제 여행계획가운데 하나이지만 문제는 돈과 시간이죠. 이제 곧 시간은 넉넉하게 생길 것 같습니다만 사람일이란게 앞날을 두고 장담할 것이 하나도 없으니 조심스러워집니다.

 

 

서호라는 이름을 가진 호수가 중국 전체에 서른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서호는 항주서호입니다.

 

 

어지간한 문인(文人)들은 항주 서호의 아름다움에 반한 나머지 서호를 서시의 미모에 견주어 서자호(西子湖)서시호니 하는 말을 써가며 칭송하기에 바빴습니다.

 

 

확실히 그렇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서호는 남북길이가 약 3.3킬로미터이고 동서로는 2.8킬로미터쯤 된다고 합니다.

 

 

주위의 길이는 약 15킬로미터정도 된다고 합니다. 서호 안에는 대표적인 두개의 둑이 있는데 하나는 백거이가 쌓은 둑이므로 사람들이 백제(白堤)라고 부르고 또다른 하나는 소동파가 쌓았으므로 소제(蘇堤)라고 부른다는 것이죠.

 

 

우리는 지금 백거이가 만든 백제를 향해 걷고 있는 중입니다.

 

 

저 멀리 보석산 앞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둑이 백제입니다.

 

 

소동파백거이같은 인물은 누구나 다 아는 역사적인 유명인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인물들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여행이니 의미가 깊을 수밖에 없습니다.

 

 

드디어 백제의 모습이 뚜렸하게 잡히기 시작합니다. 사진 속 왼쪽의 검은 배 뒤로 보이는 둑입니다.

 

 

줌을 사용해서 보석산 보숙탑의 모습을 당겨보았습니다. 똑딱이 카메라의 한계가 여실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어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서호의 대략적인 모습을 담은 안내도를 소개합니다. 소제와 백제의 위치가 확연하게 드러나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백거이의 모습을 담은 조각상을 찾아냈습니다. 당나라 시대 인물이었던 백거이는 서기 821년경부터 824년까지 약 3년동안 항주에서 지방장관을 지냈습니다. 백거이가 항주의 지방장관으로 오기전 이필(李泌)이라고 하는 인물이 호수 북쪽에 석함교라는 다리를 만들고 수문을 설치해서 호수물을 관개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백거이는 이필의 업적을 보완해서 다시 서호 안에 긴 둑을 쌓고 호수물을 관개에 사용해서 1,000경의 논밭에 물을 댈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1경은 100묘로서 약 17,400평 정도에 해당하므로 어머어마한 경지가 혜택을 본 것이죠.

 

 

백거이가 항주자사(오늘날의 지방장관인 도지사 정도에 해당함)로 부임한 것은 그의 나이 51세때였습니다. 인생의 원숙기에 항주에 부임해와서 주민들을 위해 멋진 업적을 남긴 셈이 됩니다. 그가 항주를 떠나 다른 곳으로 임지를 옮기게 되었을때 많은 주민들이 나와서 그와의 이별을 슬퍼했다고 합니다. 그런 모습을 조각으로 남겨놓은듯 합니다.  

 

 

 

멋진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탐관오리들 가운데는 남긴 업적도 없는 주제에 백성들의 피와 땀을 쥐어짜서는 억지춘양식으로 자기를 칭송케하는 내용의 공덕비나 송덕비를 세우게 하기도 했습니다만 백거이는 그런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인물인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는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었습니다. 이백, 두보와 더불어 이름을 날렸던 문학가였던 인물이 행정적인 면에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의 무덤은 낙양의 용문석굴 맞은 편 산부근에 있습니다. 용문석굴 맞은편에 향산사(香山寺) 절이 있고 그 부근에 백원(白園)이라는 묘원이 있는 것이죠. 디지털 카메라가 없던 시절에 거기를 가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는 백거이를 생각하며 백제를 향해 천천히 걸었습니다.

 

 

후대사람들은 그를 어느 정도로 평가하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서호부근에는 평화로움이 가득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