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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3 중국-절강성:화려한 남방(完)

월왕 구천의 근거지였던 부산(府山)을 찾아 떠나다 5

by 깜쌤 2013. 4. 15.

 

 

부차는 왕이 되자 백비를 태재(太宰)로 임명하여 군사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에 월나라를 공격해서 부초산에서 승리했습니다. 월왕 구천은 패잔병 5천여명을 거느리고 회계산 꼭대기에 머물고 있으면서 대부(大夫)벼슬에 있던 문종(文種)을 보내 오나라 태재인 백비에게 후한 선물을 보내고는 강화를 청했습니다.

 

우선은 살아남아야한다는 냉혹한 현실에 집착했던 월왕 구천은 오나라의 신첩(臣妾) 이 되겠다며 극도로 몸을 낮추었기에 오왕 부차가 이를 허락하려 했습니다. 이에 오자서가 나서서 반대를 했던 것이죠.

 

"월왕 구천은 고통을 잘 견뎌내는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지금 왕께서 그를 없애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훗날에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간곡히 간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의견을 물리치고 태재 백비의 계책에 따라 월나라의 강화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월왕 구천의 인내력이 대단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복수를 위해 이를 갈았습니다. 대지에 굳건히 뿌리를 내린 거목처럼 복수의 화신이 되어 때를 기다린 것이죠.

 

 

저기 앞쪽 안개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건물이 월왕전입니다. 

 

 

 월왕전으로 올라가는 길 한쪽에 전시관 비슷한 건물이 보였습니다. 

 

 

그로부터 5년후, 그러니까 기원전 489년이 되었을때 제나라의 경공이 죽었습니다. 제나라는 오늘날의 산동(山東)지방에 터를 잡았던 나라로 여기면 됩니다. 후계자로 오른 왕이 유약하고 대신들이 분열되어 나라가 어지럽다는 소문을 들은 오왕 부차는 군대를 내어 제를 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오자서가 나서서 간곡히 말렸습니다.

 

"구천은 지금 맛있는 음식조차도 한가지 이상 먹지를 않으며, 초상이 난 집에는 반드시 찾아가 위로를 하고, 병든 사람에게 문병을 다니는 이유는 훗날을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구천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훗날에 큰 고통을 당하게 될것이 뻔합니다. 지금 오나라에 있어서는 월나라는 사람 뱃속에 커다란 병을 안고 사는 것(心服之患 심복지환)과 마찬가지입니다. 형편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제나라를 치러 떠나시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간언을 듣지 않고 기어이 군대를 거느리고 출병하여 애릉 부근에서 제나라의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그런뒤 왕의 위엄을 세워가며 귀환했던 것이죠. 그후로 부차는 바른 말로 간하는 오자서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앞으로 걸어올라갔습니다. 안개속에 희미하게 보이던 건물이 드디어 대략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월왕전입니다. 월왕이라면 누구를 의미하겠습니까?

 

 

월왕 구천의 궁궐터라고 전해지는 곳이 이 부근입니다. 현재의 월왕전은 훗날에 새로 만든 것이죠.

 

 

우리는 오른쪽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갔습니다. 계단 부근에 붉은 색글씨를 새긴 비석이 서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4년 뒤, 오왕 부차는 또 북쪽의 제나라를 치려했습니다. 이때쯤 월왕 구천은 공자의 제자였던 자공이 제안한 계책대로 오나라의 태재(太宰)인 백비에게 뇌물을 바쳐 환심을 사두었습니다. 태재 백비는 자주 월나라로부터 뇌물을 받아먹은지라 시간이 날때마다 월나라의 편을 들어 오왕 부차에게 이야기를 해두었던 것이죠. 결국 부차는 백비의 말을 곧이 듣고 월에 대한 의심을 풀었습니다. 이에 오자서는 다시 한번 더 오왕 부차에게 간했습니다. 

 

"월나라는 우리 오나라에게는 뱃속의 종양과 같은 존재입니다. 왕께서는 월나라가 하는 말을 듣고 제를 치려 하지만 왕이 치려고 하는 그곳은 아무 쓸모가 없는 땅입니다. 왕께서는 부디 제를 버려두고 월을 먼저 치셔야 합니다."

 

오왕 부차는 이때도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오자서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자서는 출발하기 전에 아들에게 훗날을 대비하여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습니다.  

 

 

"나는 자주 오나라 왕에게 바른 말로 권해보았으나 듣지 않았다. 나는 머지않아 우리 오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만 너까지 오나라와 함께 죽는 것은 차마 보지못하겠구나."

 

오자서는 제나라로 사신길을 떠나며 자기 아들을 데리고 가서 제나라의 유력자인 포목(包牧)에게 부탁을 해두고 돌아와서 오왕에게 돌아가는 형편을 이야기했습니다. 백비는 오자서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이때도 중상모략을 계속하였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자서란 사람은 강포하고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의심하며 해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왕께 대해서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앞으로 큰 화근이 될것입니다. 앞서 왕께서 제나라를 치려 하였을때 오자서는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왕은 큰 공을 세우셨지요. 이때 자서는 당연히 기뻐해야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가지고 왕을 원망했습니다. 이번에도 오자서가 왕의 출병을 반대하는 것은 우리 오나라가 패하기를 기다려 자기의 주장이 옳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오자서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두셔야 합니다. 제가 사람을 시켜 알아본 결과 오자서는 사신으로 제나라에 갔을때 자기 아들을 제나라 포씨에게 맡기고 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경이 그렇게 말하지않아도 나 역시 오자서를 의심하고 있었소."

 

 

 

 

월왕전은 휑하니 비어 있었습니다. 다만 벽에는 그림 몇점이 걸려있었고 돌에 새겨진 조각품이 조금 남아 있었습니다.  

 

 

누가 누구인지 잘 구별을 할 수 없었습니다만 그림에는 이름이 남아 있어서 그나마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한가운데 칼을 들고 앉아있는 사람이 구천입니다.

 

 

결국 오왕 부차는 사람편에 촉루라는 칼을 보냈습니다. 자결하라는 의미였던 것이죠. 오자서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습니다. 

 

"슬프다. 간신 백비가 나라를 어지럽히려 하고 있는데 왕은 도리어 나를 의심하여 죽이려고 하다니! 나는 오왕 부차의 아버지 합려를 패자(覇者)로 만들었고, 부차가 왕이 되기 전에 여러 왕자들이 서로 태자가 되려고 경쟁할 때, 죽음을 각오하고 편을 들어 태자로 만들었건만 일이 이렇게 되었구나. 태자가 되어 고맙다는 뜻으로 오나라의 일부를 나에게 나누어주려 했을때도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첨하는 신하의 편을 들어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그리고는 자기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부탁해두었습니다.

 

"내가 죽거든 반드시 내 무덤위에 가래나무를 심어두어 나중에 그릇(그릇은 '오왕의 관'을 의미합니다)을 만들 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내 두 눈알을 뽑아서 서울 동문위에 걸어두도록 하라. 월나라 군대가 쳐들어와서 오나라를 없애버리는 것을 보리라."

 

그리고는 왕이 보낸 칼로 스스로 자기 목을 쳐서 죽고 말았습니다. 오왕 부차는 이 말을 듣고 격노하여 오자서의 시체를 끌어내어 말가죽으로 만든 자루에 넣어 강물에 던져 버렸습니다. 오나라 사람들이 오자서를 동정하여 강수(江水) 기슭에 오자서를 위한 사당을 만들고 이 이름을 서산(胥山)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오자서가 말한대로 훗날 월나라왕 구천은 오나라 임금인 부차에게 복수하는데 성공하고 패자(覇者)가 되었던 것이죠. 그 이야기는 회계산을 갔을때 이야기한 사실이 있으므로 생략합니다.

 

 

 

참으로 장대한 스토리였습니다.

 

 

 

 

위 지도는 춘추시대 월나라의 전성기때 영토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월 구천은 나중에 패자가 되어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이죠. 참고로 춘추시대의 패자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제 환공

2. 진(晋) 문공

3. 초 장왕

4. 오 합려

5. 월 구천  

 

어떤 이들은 오왕 합려와 월 구천을 빼고 다른 인물을 넣기도 합니다.

 

 

 

성벽에 올라 밖을 보았습니다. 민가들이 줄을 지어 단정하게 정렬해있었습니다.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시가지가 됩니다.

 

 

우리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오자서와 구천, 합려와 부차, 범려와 서시 등 숱한 인물들의 행적이 머리속에 남았습니다.

 

 

정식 입구는 여기였던가 봅니다.

 

 

우리는 뒤로 돌아서 들어온 셈이 되었던 것이죠.

 

 

입구를 통해 부산공원 밖으로 나갔습니다. 청소하는 아줌마가 우리를 향해 환한 미소를 날려주었습니다. 우중충하기 짝이 없는 날에 말이죠.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