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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3 중국-절강성:화려한 남방(完)

월왕 구천의 근거지였던 부산(府山)을 찾아 떠나다 3

by 깜쌤 2013. 4. 12.

 

안내도를 자세히 보면 오른쪽 중간쯤에 정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왼쪽에 있는 서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선 것이죠. 월왕대와 월왕전은 반대쪽에 있으니 그리로 걸어가야 합니다.

 

 

부산의 원래 이름은 와룡산이었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여기 산기슭에 월나라의 궁전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바다에서의 높이가 74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이 부근에서는 그래도 산이라고 생긴 것이 드문 처지였으니 좋은 성터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산 서대문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성벽이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있으니 구경거리가 되어줍니다.

 

 

평왕은 옥중에 갇혀있는 오사에게 '너의 두 아들을 불러들이면 살아남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는 말을 전하게 했습니다. 그런 전갈에 대해 오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전해집니다.

 

"큰 아들 은 생각이 깊은 아이이므로 부르면 반드시 올 것이지만 둘째인 은 마음이 굳세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천성을 가졌으므로 반드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아이가 욕을 참고 견디는 성격이라 나중에 반드시 큰일을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여기로 오기만 하면 잡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올리가 없습니다."

 

평왕은 오사의 말을 듣고도 사람을 보내 두 아들을 불렀습니다. 왕의 전갈을 들은 두 아들 가운데 맏이인 상은 아버지가 갇혀있는 곳으로 가려했습니다. 이때 운은 이런 말로 말렸습니다.

 

"초나라에서 우리 형제를 부르는 것은 아버지를 살려주려고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우리 형제가 이 나라를 떠나 복수를 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인질로 잡고 우리 형제를 부르는 것은 누가 봐도 뻔한 결말을 불러 일으킵니다. 출두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게 될 경우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차라리 다른 나라로 도망가서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는 산성 안으로 이어진 길을 걸었습니다. 사방에 안개가 자욱해서 어디가 어디인지 분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오운의 형인 오상은 죽을 줄을 알면서도 아버지가 갇혀있는 곳으로 갔고 결국은 비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운이 가지않자 다른 사신이 운을 압송하기 위해 왔으나 오운은 사자에게 화살을 겨누며 저항했습니다. 그리고는 탈출을 감행해서 태자 건이 머물고 있다는 송나라로 가서 태자를 모시고 살며 후일을 도모하게 되었던 것이죠. 오운의 아버지 오사는 죽기 전에 이런 말로 장탄식을 했습니다.

 

"초나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머지않아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운, 즉 오자서가 송나라에 도착한 뒤에 송나라에서는 '화씨의 난'이라는 반란사건이 터지게 되고 오자서는 태자 건을 모시고 정()나라로 도망가게 됩니다. 정나라 사람들은 오자서 일행을 환대해주었지만 정나라의 크기가 작은 것에 실망한 그들은 다시 진()나라로 갑니다.

 

 

 

이번에 찾아간 나라는 진()나라는 비극의 씨앗을 뿌린 절세미녀 공주의 고향인 ()나라와는 다른 나라입니다. 이 두개의 진나라를 확실히 구별해두어야만 이 이야기를 읽어나가는데 혼란이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진()나라를 다스린 왕은 경공(頃公)이었는데 그는 태자 건에게 한가지 일을 상의해왔습니다. 

 

"태자 당신은 정나라와 친한 사이이니 그들의 신뢰를 받고 있지 않소? 그러니 태자가 정()나라로 가서 우리 ()나라를 위해 안에서 내통해주면 우리는 쉽게 정나라를 공격해서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오. 정나라를 없앤 뒤 우리 진()나라는 태자를 그 땅의 지배자로 봉하고자 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욕심을 잉태한 즉 죄를 낳는다는 표현은 절대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태자 건은 이 제안에 귀가 솔깃해져서 정()나라로 되돌아갑니다. 기회를 엿보던 어느날, 태자 건이 데리고 있던 종이 죄를 지었기에 건은 종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종은 정나라 관리에게 달아나 태자건과 진나라 사이에 있었던 일을 고해바침으로서 정()나라의 정공(鄭公)재상인 자산(子産)에게 명을 내려 태자 건을 죽여버리고 맙니다. 초나라의 태자 건은 그렇게 한많은 일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는 것이 인생이라더니 태자 건의 인생을 두고 견주어보면 그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월왕대를 찾아 걸어가는 그날도, 길에는 비안개가 가득해서 앞을 구별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오운, 즉 오자서는 태자 건의 아들인 승()을 데리고 나라로 도망갔습니다. 드디어 이 파란많은 사연이 등장하는 사건에 오(吳)나라가 등장하게 됩니다. 정나라와 오나라의 국경인 소관(昭關)이라는 곳에 이르렀을때 오자서는 관문을 지키는 관리에게 쫒기다가 태자 건의 아들인 승과 헤어지게 되어 혼자 정신없이 도망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도망치던 오자서는 강수(江水 - 오늘날의 양자강) 기슭에 이르러 어떤 어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위급함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어부의 도움에 감격한 오자서는 자기가 차고 있던 칼을 끌러 어부에게 사례로 드리고자 했습니다.

 

"이 칼은 백금(百金)의 가치를 가지고 있소.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이 칼을 당신에게 드리고 싶소."

 

이때 어부가 한 말이 걸작이었습니다. 

 

"초나라에는 다음과 같은 방이 붙어있다고 들었소. 오자서를 잡는 자에게는 속( 오늘날의 조, 혹은 찧지 않은 곡식) 오만섬과 최고의 벼슬자리인 집규(執珪)의 자리를 준다고 합디다. 만일 내가 그런 자리와 보상을 탐내었으면 그런 백금의 칼이 문제겠소?"

 

 

 

길은 끊임없이 앞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오자서는 오나라 땅에 들어섰으나 도성으로 가는 길에 병에 걸리기도 하고 식량이 없어 빌어먹기도 하는 등의 고생을 했습니다. 오나라의 수도가 바로 오늘날의 소주(蘇州)입니다. 소주는 상해(上海)옆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한번 더 지도를 올려드립니다.

 

 

 

2번으로 표시된 곳이 오나라 땅이고 그 오른쪽에 보이는 옥색 호수가 소주의 태호를 나타냅니다.

 

 

안개속을 헤치고 얼마를 걸었더니 드디어 너른 마당이 나오면서 기념비가 하나 등장했습니다.

 

 

혁명열사기념비더군요. 열사라....   오자서 같은 사람은 중국인들에게 충신이며 열사의 표본으로 칭송을 받는 것으로 압니다만.....

 

 

우리는 다시 월왕대로 가는 길을 찾아나섰습니다. 마치 오나라의 수도를 향해 정신없이 나아가기만 했던 오자서처럼 말입니다.

 

당시 오나라 왕은 ()였고 공자(公子) ()이 장군으로서 병권(兵權)을 쥐고 있었습니다. 오자서는 공자 광을 통해 오왕 요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 오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초나라의 국경에 있는 종리(鐘離)라는 마을과  오나라의 국경쪽에 있는 비량지(卑梁氏)라는 마을의 여자들은 누에를 치고 있었는데 누에의 먹이가 되는  뽕나무 잎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작은 다툼이 확산되어 드디어 오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전쟁이 시작된 것이죠. 오나라에서는 공자 광을 시켜 초나라를 치게 했고 공자 광은 종리거소라는 고을을 함락시킨 뒤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오자서는 오왕 요를 만나 권유했습니다.

 

 

 

 

"지금 초나라와 전쟁을 하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으니 공자 광을 다시 보내심이 어떤지요?"

 

그러자 공자 이 거절을 하고 나섰습니다.

 

"임금이시여. 오자서의 형과 아버지가 초나라 평왕에 의해 살해된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가 왕께 초나라를 치라고 권하는 것은 자기 부모형제의 원수를 갚기 위함이지 우리나라를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금 초나라를 친다고 해도 꼭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공자 광의 반대 이유를 듣고난 오자서는 비로서 공자 광의 속셈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해도 속마음은 딴데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죠. 여기에는 깊은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그 사연을 알기도 전에 공자 광의 속셈을 눈치챈 사람이라면 눈치 9단으로 인정해 드릴 수 있습니다.)   

 

 

 

 

공자 광의 속셈을 알아차리려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야 합니다. 공자 광의 아버지는 오왕 제번(諸樊)입니다. 오나라 왕이었던 제번에게는 세사람의 아우가 있었습니다. 바로 밑의 아우는 여제(餘祭), 그 다음은 이말(), 막내가 계자찰(季子札)입니다. 오왕 제번은 막내인 계자찰이 훌륭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태자를 따로 세우지 않고 세 아우에게 차례차례 왕위를 물려주어서 결국에는 막내인 계자찰에게 나라를 물려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제번이 죽고나서 왕위는 여제에게 돌아갔고, 여제가 죽은 뒤에는 다시 이말이 뒤를 이었습니다. 이말이 죽고나자 왕위는 계자찰에게 돌아가야했지만 계자찰은 왕위를 물려받지 않으려고 도망을 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나라에서는 이말의 아들인 공자 요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오자서가 오나라에 갔을때의 임금이 바로 ()였던 것이죠.

 

공자 광의 입장에서는 제번의 아들인 자기가 마땅히 왕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사촌인 요가 왕위에 있는 것이 심히 못마땅했으므로 사람을 모아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오자서는 꿰뚫어보았던 것이죠. 

 

 

 

 

오자서는 공자 광이 현재의 왕인 요를 죽이고 자기가 왕위에 오르고자 한다는 마음을 가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자서는 전저(專諸 이때는 전제라고 하지 않고 전저라고 읽습니다)라는 인물을 공자 광에게 추천해주고 자기는 조정에서 물러나 초나라 태자였던 건의 아들인 승을 모시고 들판에서 농사를 지으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러니까 오왕 요가 왕위에 오른지 12년째 되던해 마침내 초나라의 평왕이 죽음을 맞았습니다. 평왕의 후계자로는 진(秦)나라 공주의 아들인 진()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초나라 소왕(昭王)입니다.

 

오왕 요는 초나라가 국상을 당한 것을 천재일우의 멋진 기회로 여겨 자기 동생인 공자 개여(蓋餘)와 촉용(燭庸)을 시켜 초나라를 기습공격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고스란히 당하고 있을 초나라가 아니었으므로 역공으로 나와 오히려 오나라의 군대가 퇴로를 차단당한채 포위되고 맙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 글에 계속하겠습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