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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3 중국-절강성:화려한 남방(完)

월왕 구천의 근거지였던 부산(府山)을 찾아 떠나다 4

by 깜쌤 2013. 4. 13.

 

이 부근에 월왕대가 있을터이지만 짙은 안개로 인해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오왕 요는 자기의 동생인 개여와 촉용을 장군으로 하여 초나라의 영토를 치게하고 숙부인 계자찰을 진(晉)나라로 보내어 제후들의 움직임을 살피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초나라의 군대에 의해 퇴로를 차단당하여 진퇴양란의 지경에 빠지게 된 것이죠. 이런 기회를 맞아 공자 광은 자기가 공을 들여놓았던 전저를 불렀습니다.  

 

"이런 시기를 잃어서는 곤란하오. 구하지 않고서야 무엇을 감히 구할 수 있겠소? 그대도 알다시피 내가 이나라의 진정한 후계자임에도 불구하고 장군으로 남아있소. 이제 홀로서기를 해야할 기회가 되었소."

"그렇습니다. 이제 왕 요를 죽일 기회가 왔습니다. 그 어머니는 늙었고 두 아우는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터에 가 있지만 돌아올 길을 차단당해서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공자 광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의 몸은 바로 그대의 몸이다."

 

 오왕 요가 왕위에 오른지 12년째 되던해 4월 병자일에 공자 광은 무장한 병력을 자기집 지하실에 대기시켜 놓고 술을 마련해놓은 다음 왕을 초대하였습니다. 오왕 요도 빈틈없는 인물이어서 연도에 경호병을 늘어세우고 궁전을 나와 공자 광의 저택에 갔습니다.

 

 

 

안개속의 길을 헤매던 우리는 마침내 월왕대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았습니다. 월왕 구천의 궁전터라고 전해지는 곳까지 다왔다는 말이 되는 것이죠.

 

출입문과 계단에 서있는 사람들 모두가 왕 요의 친척 심복들로서 자루가 긴 칼을 손에 쥐고 있었으므로 분위기는 꽤나 삼엄했습니다. 주연이 한참 무르익었을때 공자 광은 거짓으로 발이 아픈 시늉을 하며 잔치자리를 나와서 지하실에 갔습니다. 지하실에서 공자 광을 만나 명령을 받든 전저는 구운 생선 요리 속에 비수를 감추고 잔치자리에 들고 들어갔습니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오왕 요 앞에 나아간 전저는 생선을 찢고 비수를 꺼낸뒤 왕을 찔렀고 오왕 요는 그자리에서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전저 자신도 왕을 모시고 서있던 부하들에게 붙들려 현장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왕이 암살당한터라 오왕 요의 신하들은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자 광의 신호에 맞추어 지하실에 숨어있던 병력이 쏟아져 나와 왕의 부하들을 주살함으로서 사건은 마무리되고 맙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공자 광이 중심이 되어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 것입니다. 공자 광은 스스로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바로, 새로운 오나라 왕인 합려(闔閭 혹은 闔慮)입니다. 합려는 전저의 아들을 상경(上卿)으로 삼고  정치를 해나갑니다.

 

 

 

문표를 파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는 그냥 들어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일부러 표를 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왕 합려는 오자서를 불러들여 외교고문격인 행인(行人)이라는 직위에 임명하고 나라일을 처리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오자서가 등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죽은 오왕 요의 두 동생은 군사를 거느린채 초나라에 항복했고 초나라는 그들을 (舒)라는 곳을 주어 살게 했습니다.

 

합려가 왕으로 즉위한지 3년째 되던해 오자서는 백비(伯비)와 함께 초나라를 쳐서 를 함락시키고 초나라에 투항했던 두 공자를 사로잡았습니다. 오자서의 복수극이 서서히 시작되는 것이죠. 오자서는 여세를 몰고 초나라의 수도인 영 지방까지 쳐들어가려 했지만 장군 손무(孫武)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말렸습니다.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는 이때 오왕 합려의 초청으로 오나라에 와 있었던 것이죠.

 

 

 

소나무 분재가 오자서의 기개를 닮은듯 합니다.

 

크고 작은 전투에서 자주 승리를 거두어가던 오자서와 손무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옵니다. 합려가 왕위에 오른지 구년째 되던해 합려는 오자서와 손무를 불러 상의를 했습니다. 기원전 506년의 일입니다.

 

"저번에 경들은 아직은 초나라 서울 으로 쳐들어갈 시기가 아니라며 나를 말렸소. 지금은 과연 어떻소?"

"초나라의 장군으로 있는 낭와는 욕심이 많은 자여서 초의 속국인 당(唐)과 채(蔡) 두나라로부터 원한을 사고 있습니다. 초를 치실 생각이면 먼저 당과 채를 우리편으로 만드셔야 합니다. 그러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합려는 그 말을 받아들이고 계책대로 해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다섯번이나 초나라의 군대와 싸워 승리한 후에 오나라의 군대는 마침내 영을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초소왕은 수도를 버리고 도망을 쳤고 오왕 합려가 영에 입성하므로서 초는 큰 곤욕을 당하게 된 것이죠.

 

오자서는 예전에 초나라의 대부로 있던 신포서(申包胥)와 친하게 지냈었습니다. 오자서가 망명길에 오를때 신포서에게 자기는 기어이 초나라를 멸망시키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을 밝힌바 있었습니다. 그때 신포서는 오자서를 보고 자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초나라를 지키고 말겠다는 말로 응대를 한적이 있었습니다.

 

오자서가 영을 공격하였을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초소왕을 잡으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초나라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던 오자서는 대신 초평왕의 무덤을 파헤친 뒤 시체에 삼백번이나 매질을 하는 것으로 복수를 했던 것입니다. 피난 가있던 산중에서 이 소식을 들은 신포서는 사람을 보내 이렇게 전했습니다.

 

 

 

마침내 우리들은 월왕대에 도착했습니다. 월왕 구천의 근거지였던 곳입니다.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역사의 현장에 와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월왕대라는 현판의 글자가 선명합니다. 

 

 

 

월왕 구천이 근거지로 삼았던 곳에 만들어진 성문을 안에서 본 모습입니다.

 

 

"당신의 복수는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내가 듣기에 '사람이 수가 많으면 한때는 하늘을 이길 수 있지만 하늘이 한번 결정을 내리게 되면 또 능히 사람을 깨뜨리게 된다'고 하였네. 당신은 원래 평왕의 신하로서 그를 섬기고 있었는데 이제 그 평왕의 시체를 욕보였으니 이보다 더 천리(天理)에 어긋난 일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이 말을 들은 오자서는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일렀습니다.

 

"부디 신포서에게 잘 전해주기 바란다. '해는 지고 갈길은 멀기 때문에(日暮途遠 일모도원) 갈팡질팡 걸어가며 앞뒤를 분간할 겨를이 없었다고 말일세."   

 

이에 신포서는 진(秦)나라로 달려가 구원을 요청했으나 진나라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신포서는 진나라 궁궐앞에서 칠일 밤낮을 울었습니다. 진을 다스리던 애공(哀公)은 신포서를 딱하게 여겨 전차 500대를 포함한 군대를 보내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진나라에서 파견한 군대와 전쟁을 시작한 오나라는 패배하고 맙니다.

 

 

 

그동안 오왕 합려는 초나라에 머물면서 소왕을 찾고 있었지만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틈을 타 오왕 합려의 동생인 부개는 싸움터에서 도망쳐 오나라로 귀국하더니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는 반란사건을 터뜨리고 맙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합려는 급히 귀국해서 동생인 부개를 공격했고 전투에서 패배한 부개는 초나라로 도망쳐서 몸을 숨겼습니다. 그 바람에 소왕은 초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고 합려의 동생인 부개를 초나라에 살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리저리 복잡하게 사건이 얽히면서 진흙탕 속의 개싸움 비슷하게 진행되어 버린 것이죠.  

 

그 사건이 있고나서 다시 2년 뒤 합려는 태자 부차(夫差)에게 군대를 주어 초를 공격하게 했는데 거듭되는 오나라의 공격에 지친 초나라는 수도를 에서 이라는 곳으로 옮기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에 드디어 월나라 구천과 운명적인 원수관계를 맺는 부차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이때가 어쩌면 오의 전성기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잠시 성문을 구경한 우리들은 다시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오나라는 오자서와 손무의 맹활약으로 강대국인 초를 굴복시켰고 제와 진()을 위협하며 남쪽으로 내려가서 월나라를 굴복시켰습니다. 이때쯤에 공자가 노나라의 재상이 된 것이죠. 기원전 500년의 일입니다.

 

합려가 왕위에 오른지 19년째 되던 해, 오나라는 월나라와 전쟁을 시작합니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의 군대를 맞아 싸우며 선전(善戰)을 했는데 그때 합려의 손가락에 상처를 입히게 되었습니다. 합려의 부상으로 오나라의 군대는 후퇴했지만 손가락 상처가 덧나면서 사망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너는 구천이 이 아비를 죽인 것을 잊을 수 있겠느냐?"

"어찌 감히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합려는 죽으면서 아들 부차에게 복수를 맹세하게 한 것이죠. 이로써 오 부차와 월 구천 사이에 기나긴 원한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와중에 오자서가 자연스레 끼어들게 된 것이고요..... 

 

 

 

우리는 월 구천이 근거지로 삼았던 월왕대를 지나 월왕전으로 나아갔습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