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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3 중국-절강성:화려한 남방(完)

주은래! 그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그의 무덤을 만들고 갔다

by 깜쌤 2013. 3. 26.

 

삼미서원 구경을 마치고 나자 그래도 시간이 남았길래 주은래기념관을 가보기로 했습니다. 소흥 시가지 곳곳에는 예술성이 담긴 작품들이 여기저기 숨어있었습니다.

 

 

누구를 묘사한 작품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수염을 쓰다듬은 흔적이 역력합니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우리는 재미있는 시설물을 발견했습니다. 도로 한가운데 천막처럼 쳐놓은 저 시설물은 자전거와 오토바이 사용자와 인력거꾼을 위한 시설인듯 합니다.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그들이 조금이라도 눈비를 덜맞도록 하자는 배려에서 나온 시설물인듯 합니다.

 

 

작은 배려가 사람살이를 아름답게 만드는 법입니다.

 

 

우리는 큰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소흥시내 곳곳에는 물길이 누비고 있었습니다. 노신로에서 주은래 기념관은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주은래! 중국 현대사를 빛낸 걸출한 인물입니다. 현대판 제갈량이라고 보면 거의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나라의 건국자 유방의 부하였던 소하장량 같은 역할을 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모택동 정권의 2인자로서 많은 인민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내막이 어쨌거나 간에 국민들로부터 추앙을 받았고, 받고 있으며, 받을 수 있는 인물이라면 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주은래는 소흥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주은래의 조상이 소흥에서 살았던 것이죠.

 

 

우리는 지금 주은래의 할아버지가 살았다는 장소를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소흥의 집들은 흰색 벽을 가진 것이 특징이지만 특별한 유적에 해당하는 건물은 짙은 회색으로 색칠을 해두어서 누가봐도 유적지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두었습니다.

 

 

우리는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주은래의 일생을 보며 현명한 인생이 무엇인지를 자주 생각합니다. 정치인을 포함한 지도자들의 몸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주은래의 삶을 보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으련만 온갖 물의를 일으키는 한심한 사람들을 보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맙니다.

 

 

어떤 이들은 모택동이 일생동안 주은래를 제거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 주장이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주은래는 2인자로서 현명하게 처신을 하며 꼿꼿한 일생을 살았기에 늘 인민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젊었던 날 주은래는 프랑스와 일본 유학을 다녀온 대단한 지식인이었습니다. 등소평을 만난 것은 프랑스 빠리에서였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는 통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주은래의 할아버지가 살았다는 그 집도 큰집은 아니었습니다.

 

 

가구도 수수했고 검박한 기운이 가득했습니다.

 

 

주은래의 일생을 이런 글에서 다 쓴다는 것은 무리한 일입니다. 나는 주은래의 삶에 얽힌 6무(6無)를 소개하는 정도로 그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6무는 말그대로 그의 인생에서 여섯가지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첫번째가 사불유회(死不留灰)입니다. 죽은 뒤에는 유골을 남기지 않는다는 의미죠. 그는 1976년 1월에 죽었습니다. 팔보산에서 화장한 뒤 유골을 중국 산하에 뿌렸으니 무덤이 남아 있을리가 없게 된 것입니다.  

 

 

두번째는 생이무후(生而無後)입니다. 살아 생전에 후손을 남기지 않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경우 일반인들이 그를 추모하는 것은 무덤이나 살았던 집이나 후손이지만 주은래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후손을 남기지 않았으니 보통 사람이 하기 힘든 일을 한 것이죠. 결혼을 했으니 부인은 있었습니다. 부인의 이름은 등영초입니다.

 

천안문에서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집회를 열었을때 강경책을 써서 진압한 인물은 등소평과 이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붕(李鵬 리펑)을 주은래의 아들로 알고 있는 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는 주은래의 양자이지 직계후손은 아닙니다. 주은래는 혁명운동시절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둔 동지들의 자녀를 네명이나 양자로 입양시켜 키웠다고 합니다. 

 

  

세번째가 바로 관이무형(官而無型) 이었습니다. 높은 관직에 있었지만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런 처신이 주은래로 하여금 영원한 2인자 노릇을 하게 한 것이지만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모택동을 능가하는 존경을 중국 인민들로부터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중국인들이 그를 평민재상이라고 부르겠습니까?    

 

 

주은래는 어렸을때 잠시 소흥의 큰아버지댁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여기가 바로 그런 삶의 현장일지도 모릅니다.

 

 

네번째는 당이무사(黨而無私) 입니다. 당 안에서 파벌을 만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그는 대의를 위해서 사심없이 일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다섯번째가 노이불원(勞而不怨)입니다. 힘든 일을 해도 원망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많다고 해서, 힘이 든다고 해서 결코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살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으니 그의 인물 됨됨이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은래의 어렸을 적 모습입니다.

 

 

여섯번째는 사불유언(死不留言)입니다. 죽은 뒤에도 유언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분란의 소지를 막았다는 뜻이겠지요. 이런 일생을 살았으니 어찌 존경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예능분야에도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림 솜씨는 제법이었던 모양입니다. 주은래 수상(총리)이 직접 그린 그림입니다.

 

 

우리도 그런 대통령이나 총리를 모실 수 없는 것일까요? 

 

 

죽은 뒤 역사가들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진정으로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지 싶습니다.

 

 

주은래  집안의 족보도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주은래의 동생이 유명한 주동우입니다. 사진 속 왼쪽 인물이죠.

 

 

주은래의 신분증도 보관되어 있더군요.

 

 

정말 모든 면에서 그는 검박한 일생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일본 유학도 했었습니다.

 

 

주은래 기념관도 간소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만년의 모습입니다.

 

 

서안사변 당시의 모습입니다. 장개석이 장학량에 의해 서안에서 감금당한 사건이 그 유명한 서안사변입니다.

 

 

청년기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스물 여섯의 한창때의 모습입니다.

 

 

대장정후 연안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그는 모택동과 함께 대장정을 함께 겪었습니다.

 

 

왼쪽이 모택동입니다.

 

 

주은래는 1976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은래 조부고거를 나온 뒤 우리는 맞은편에 있는 기념관을 찾아갔습니다.

 

 

거기도 상상외로 검소했습니다.

 

 

동상 하나, 그리고 간단한 소개......

 

 

작은 규모.......

 

 

우리도 이런 지도자를 가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글씨는 단아하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기념관을 보고 나왔던 것입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