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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3 중국-절강성:화려한 남방(完)

어린 시절 노신이 공부한 곳을 찾아보았다

by 깜쌤 2013. 3. 22.

 

노신로에는 삼미서옥(三味書屋)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노신이 어렸을때 공부를 한 곳이죠. 서옥 앞에는 작은 운하가 있습니다. 삼미서옥노신고거는 약간 비스듬한 위치에서 마주보고 있다고 여기면 됩니다. 그러니 아주 찾기 쉽습니다.

 

 

오봉선 한척이 관광객을 태우고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런 여유로움이 너무 좋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관광객을 기다리는 오봉선이 줄을 지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본대로 노신은 어렸을때 저택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만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것이겠지요. 

 

 

노신은 집안에서 일하는 하인들로부터는 귀공자 대접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그러면서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삼미서옥에서 공부를 했던 것이죠. 1881년생이니까 당시의 교육환경이 대강 짐작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서당중에서 규모가 좀더 큰 곳이 아니었을까요?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보냈던 어린시절의 추억은 열세살경에 갑자기 끝이나고 맙니다. 노신의 할아버지가 절강성 과거시험 주관자에게 뇌물을 제공했던 사실이 드러나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어버린 것이죠.

 

 

일이 꼬이려니 그랬는지는 몰라도 노신의 아버지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하루 아침에 망해버린 것이나 다름없게 된 것입니다.

 

 

그의 어린 시절의 이름은 주장수(樟壽)였습니다. 원래 성이 주씨였다는 사실은 저번 글에서 이야기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본명인 주수인(樹人)은 열일곱살때 학교에 들어가며 개명하며 얻은 것이죠.

 

 

이제 우리는 삼미서옥으로 들어가는 중입니다.

 

 

여기가 삼미서옥입니다. 노신이 어린 시절 공부를 했던 현장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글을 보면 삼매서옥이라고 소개를 하기도 하는데 사진 속의 현판을 보면 맛 미()자를 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매자 가운데는 라는 글자와 비슷한 글자가 있습니다. 새벽이나 어두움을 의미하는 글자인 매(昧)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독서삼매라고 할때도 이 글자를 씁니다.

 

 

통로에서만 볼 수 있도록 해두었습니다. 나는 한무리의 관광객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촬영을 했습니다.


 

 

왼쪽 구석에 보이는 특별한 책상이 노신의 자리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가세가 기울면서 노신의 처지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이때 경험한 인간군상에 대한 노신의 씁쓸한 경험은 이후로 벌어진 그의 일생을 지배하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통로에는 구경하는 관광객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망해버린 집안 형편때문에 노신은 무료 공부가 가능했던 남경(南京난징)에 있는 수사학당에 진학합니다. 요즘말로 하자면 해군학교 비슷한 곳이었습니다. 조금 뒤 그는 광무철로학당이라는 철도학교로 옮겨가서 본격적인 신학문을 접하게 됩니다.

 

 

재주가 출중했던 노신은 철도학교를 졸업한 뒤 국비유학생 신분으로 일본으로 가게 됩니다. 2년 정도의 공부를 통해 일본어를 익힌 뒤 그는 1904년에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의학공부에 매진하던 중 수업시간에 보여주는 중국인 학살장면이 담긴 영화를 보고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일본 학생들의 반응에 격분하여 그는 학교를 그만 두게 되고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낍니다. 

 

 

학교를 자퇴한 뒤에도 일본에 남아 문학작품을 번역하는 일도 하던 노신은 1909년에 귀국했습니다. 귀국후 그는 항주에서 교사생활을 하게 됩니다만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는 학교 분위기때문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고 합니다.

 

 

1911년에 청이 멸망하면서 중국은 엄청난 정치적인 격변속에 내동이쳐지게 됩니다. 노신의 고향인 소흥에서도 변화의 흐름이 밀려오게 되고 그는 소흥에서 사범학교 교장이 되어 의욕을 가지고 일을 했지만 몇달을 견디지 못하고 교육계 관료들과의 충돌 때문에 다시 사직하고 맙니다. 이런 사실을 이 어린 아이들은 알고나 보는 것일까요?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됩니다. 당시 남경 임시정부의 교육부 장관이던 채원배(蔡元培)가 루쉰을 찾아오게 되고 그 인연으로 노신은 교육부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베이징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는 것이죠. 

 

 

채원배의 모습입니다.

 

 

뒤편으로 들어가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교사의 개인 공간이 나타납니다.

 

 

제법 정갈했습니다. 나는 이런 모습에서 단아함을 느꼈습니다.

 

 

관람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노신은 이미 중국 인민들에게 민족의 영웅으로 비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노신의 첫 번째 작품집인 눌함(呐喊)이 1923년에 발표됩니다. 눌함이란 말을 어떤 분들은 외침 정도로 번역을 하더군요.

 

 

1918년 5월 15일자 신청년에 발표된 단편소설이 너무도 유명한 광인일기입니다. 이 글을 발표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노신(魯迅 루쉰)이라는 필명을 사용했습니다. 

 

 

1921년부터 그는 <아Q정전>을 쓰게 되었습니다.

 

 

노신은 일생동안 중편 1편, 단편 32편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나중에 노신은 계몽주의자로 혹은 혁명적인 사상을 지닌 위대한 인물로 추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후반부 행적은 참으로 다양해서 이런 글 속에 다 옮기기가 어렵습니다.

 

 

그가 중국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했습니다.

 

 

중국 인민들에게 애국자로 추앙을 받을만큼 가치있는 생을 살았던 분이 노신이라는 분이었습니다.

 

 

삼미서옥 한쪽에는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들과 노신의 삶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소개되어 있더군요.

 

 

주희......

 

 

여성혁명가 추근...... 그녀에 대해서는 항주에 관한 글을 쓸때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채원배......

 

 

한바탕의 격전을 치르기 위해 몰려든것 같았던 초등학생들이 물러간 뒤 나는 다시 찬찬히 안쪽을 살폈습니다.

 

 

바깥으로 나갔더니 관람을 마친 중국 초등학교 아이들이 삼미서원앞 노신로 거리를 떠나고 있었습니다.

 

 

직업의식이 발동한 나는 교사들의 행동과 아이들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중국 아이들의 옷차림에서도 이젠 부티가 나기 시작합니다. 이 아이들은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지 않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기를 빌어보았습니다. 물론 중국이 자기들의 힘을 믿고 건방떠는 일은 당연히 없어야겠지요.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