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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3 중국-절강성:화려한 남방(完)

열혈애국시인에게는 이런 사랑 이야기가 숨어있었다

by 깜쌤 2013. 3. 15.

나는 고학헌으로 가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여기에서 이정표를 잘 봐둘 필요가 있습니다. 고학헌! 외로운 학이 와서 노니는 건물일까요? 채두봉비는 또 무엇일까요? 채두봉! 오늘 글의 핵심내용이 될 낱말입니다.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이 고학헌입니다.  

 

  

 이제 앞에 보이는 못의 이름이 송지당(宋池塘)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송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연못인가 봅니다.

 

 

 우리는 고학헌으로 들어가보았습니다.

 

 

계단을 오르면서 앞을 보면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와 지나온 길과 송지당이 보입니다.

 

 

하늘이 흐린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정자 안에는 멋진 현판글씨가 걸려있었습니다. 고학헌이라는 글자였습니다.

 

 

고학헌 정자안에서 사방을 보면 멋지게 써서 걸어둔 문장들이 가득합니다. 어쩌면 육유의 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고학헌에서 내려갑니다. 잠깐! 내려가기 전에 확인해둘 것이 있습니다. 멀리 보이는 벽면의 검은 판에 글씨가 가득 들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진 속 분홍색 옷을 입은 아가씨가 걸어가는 뒷면입니다. 그곳이 바로 채두봉비입니다.

 

  

고학헌 계단을 내려가면 좌우로 멋진 모습의 나무가 서있습니다. 척 봐도 괴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방금 고학헌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우리가 내려온 곳을 관광객들이 오르고 있었습니다.

 

 

고학헌 주위로 걸려있는 이 글들은 누가 쓴 글씨일까요?

 

 

남송 시절, 항주 소흥 인근에 육유라는 시인이 살았습니다. 1125년생이니까 지금부터 약 900여년 전의 인물입니다. 중국역사로 치자면 절강성 항주에 도읍을 두었던 남송(南宋)시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남송은 여진족이 세운 나라와 생존을 건 투쟁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송은 남진해오는 금의 힘에 밀려 원래의 수도였던 개봉을 버리고 양자강 남쪽으로 천도하여 항주에다가 새로운 수도를 정했던 것입니다. 그게 서기 1127년의 일이었습니다.

 

육유는 그런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남송은 수도를 오늘날의 절강성 항주에 정합니다. 당시에는 항주를 임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소흥에서는 고속버스로 한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습니다. 항주는 상하이나 소주에서도 그리 멀지 않습니다. 추상같은 법집행과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포청천은 북송시대 개봉에서 활약했던 인물입니다.        

 

 

금나라와 투쟁을 계속해야했던 남송이었지만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워서 하류층 농민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귀족들은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멋진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남송이 누린 평화는 북쪽의 강국으로 등장한 금나라에게 돈을 주고 유지한 평화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금의 협박과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줄 몰랐던 남송의 황실과 귀족들은 막대한 비단과 은을 해마다 공물로 바치는 댓가로 평화를 보장받았던 것입니다. 북한에 물자를 퍼주고 평화를 획득하려는 일부 철없는 자들은 역사 앞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현실에 분노한 이가 육유였습니다. 그는 요즘으로 치자면 열혈애국시인이며 정치가였던 셈이죠. 그는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게 여든을 넘겨가며 살았으니 엄청 장수를 한 것이죠. 1210년에 죽었으니 85세까지 살았습니다.

 

애국시인 윤동주가 스물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뜬 것에 비하면 그는 정말 오래 살았습니다만 그렇게 장수했기때문에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파는 애절한 사랑의 기록의 남긴 것이니 그것 또한 하늘의 뜻이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육유(陸遊, 1125~1210)는 스무살때 외사촌 여동생이었던 당완(唐婉)이라는 여성과 결혼을 했습니다. 당시의 사회적인 풍습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외사촌과 결혼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육유에게 당완이라는 여성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육유와 친하게 지내온데다가 시를 알고 글을 쓸줄 알았으며 인생의 멋이 무엇인지를 알고 학문의 세계를 아는 여성이었으니 육유에게는 정말 잘 어울리는 배필이었을 것입니다.

 

두사람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만 육유의 어머니가 장애물로 등장합니다. 육유의 어머니가 며느리를 이상하게도 너무 싫어해서 이혼을 강요했던 것이죠. 자세한 이유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은 모양입니다만 3년간의 결혼생활 중에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것도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거기다가 재주가 출중한 며느리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아들이 외사촌과 결혼을 했으니 외부인들이 보내는 눈총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속사정이 어쨌거나 간에 어머니의 끊임없는 강요를 이겨낼 수 없었던 육유는 결국 아내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사랑이냐 효도냐 하는 갈림길에서 효도를 택했다고 봐야겠지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송나라는 유학이 제법 융성했던 시대입니다. 고려말 조선 초기에 등장했던 사대부라는 새로운 지식층이 송나라 시대에 이미 등장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육유의 처사가 충분히 이해됩니다.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가 유교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었던 시대이니 사대부의 관점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트집을 잡아 며느리를 구박하는데 이겨낼 자식은 없었을 것입니다. 두사람은 눈물을 머금고 이혼을 했고 육유는 2년 후에는 어머니가 소개한 왕씨 성을 가진 여자와 재혼을 했습니다. 육유의 아내로서 재기가 넘쳤던 당완도 결국 조사정(趙士程)이란 남자에게 시집을 간 것이죠. 비극이 잉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위의 사진은 채두봉비입니다. 속에 쓰여진 사연을 보면 눈물이 흐르도록 만들어줍니다. 육유와 당완사이의 금슬은 좋았지만 어머니의 강압적인 명에 의해 두사람은 이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헤어진 두사람은 마음 속으로만 상대방을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7080세대들이 기억하는 노래가운데 <갑돌이와 갑순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1960년대를 풍미했던 민요가수 김세레나라는 분이 불러서 유행시킨 음악이었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 마을에 살았더래요
둘이는 서로 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그러나 둘이는 마음뿐이래요
겉으로는 음~~ 모르는 척했더래요

2.
 

그러다가 갑순이는 시집을 갔더래요
시집간 날 첫날밤에 한없이 울었더래요
갑순이 마음은 갑돌이뿐이래요
겉으로는 음~~ 안그런 척했더래요

3.
 

갑돌이도 화가 나서 장가를 갔더래요
장가간 날 첫날밤에 달 보고 울었더래요
갑돌이 마음은 갑순이뿐이래요
겉으로는 음~~ 고 까짓것 했더래요
고 까짓것 했더래요

 

가수 김세레나씨가 불러 1960년대를 살았던 국민들의 마음을 울렸던 노래입니다. 사실 이노래는 전래민요 비슷하게 불려져 왔었습니다만 소문에 의하면 경기도 여주에서 1870년대에 벌어진 일이었다고 합니다. 1930년대에 누가 엘피(LP)판으로 녹음해서 발표를 했다는데 원래의 제목은 ‘박돌이와 갑순이’였다고 합니다.

 

박돌이와 갑순이는 한마을에 살았소.  

두사람은 서로서로 사랑을 하였소. 

그러나 그것은 마음 뿐이오.

겉으로는 음~~~ 서로서로 모르는척 하였소.

 

그러는중 갑순이는 시집을 갔다나요.

시집가는 가마속에 눈물이 흘렀대요.

그러나 그것은 가마속 일이오.

겉으로는 음~~~ 아무런일 없는척 하였소.

 

화가나서 박돌이도 장가를 들었대요.

그날밤에 서방님은 하늘높이 웃었오.

그러나 마음은 아프고 쓰리었소.

겉으로는 음~~~ 그까짓년 하여도 보았소

 

 

마음으로만 나눈 사랑을 하였어도 이별의 아픔은 큰 것이었는데 육유와 당완은 어렸을때부터 같이 자란 처지에다가 삼년간 부부로 살았었고 거기에다가 어머니(당완의 입장에서는 시어머니)의 강요로 헤어진 것이니 그 슬픔과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헤어진 채로 모르고 살았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인데 사람살이 일이란게 어디 그렇게 평탄하게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입니다. 서기 1151년 소흥 21년 봄, 육유의 나이 스물여섯살이 되었을때 두사람은 우연히 심원에서 마주치게 됩니다. 그때부터도 심원은 유명해서 사람들에게 개방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당완은 남편 조사정과 같이 동행을 했던 것 같습니다.

 

부부로 살다가 타의에 의해 눈물로 헤어진 사람이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두사람이 느낀 감정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당완이 너무 충격을 받아 안색이 변하자 남편 조사정이 누구냐고 물어보았던 모양입니다. 당완이 두사람 사이의 일을 현재의 남편 조사정에게 어느 정도 자세하게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지만 흘러다니는 이야기에 의하면 사촌이라고 했더니 남편 조사정이 그 형편을 이해했다고 합니다.

 

당완이 사람을 시켜 차려온 술과 안주를 놓고 두 사람은 말없이 한잔의 술을 나누고 헤어졌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그들이 남긴 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완이 남편 조사정과 함께 자리를 뜨자 한동안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서있던 육유는 붓을 들어 자기의 감정을 담아 벽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육유가 남긴 채두봉(釵頭鳳 차두봉이라고 읽어도 됨)이라는 입니다.  바로 아래 사진의 글입니다.

 

 

    

라는 글자는 비녀를 나타내는 글자로서 차, 혹은 채로 발음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글에서는 채두봉이라하기도 하고 어떤 글에서는 차두봉이라고도 하는 것이죠. 육유가 쓴 글의 원문은 아래 글 상자속에 있습니다. 어리바리하기 짝이 없는 깜쌤의 짧은 한자실력으로 도저히 원문을 읽을 수가 없어서 인터넷 검색을 하여 원문과 번역문을 가져왔음을 고백합니다. 

 

 

               釵頭鳳 (차두봉)

 

                               陸游 (육유) 

 

紅酉禾手,黃呻酒,滿城春色宮牆柳.

홍유화수,황신주,만성춘색궁장류。

      고운 손 살포시 들어 술잔을 권할 적에 궁 담 안 버들가지 봄빛이 무르익었었지 

 

東風惡,歡情薄。一懷愁緒,幾年離索.

동풍악,환정박。일회추서,기년리색。 

       저 몹쓸 봄바람 좋은 인연 빼앗아 가서. 쓸쓸한 이 마음 숨겨온 지 몇 해였나?

  

錯!錯!錯!

착!착!착!

      틀렸어, 틀렸어, 틀려 버렸지.  

 

春如舊,人空瘦,淚痕紅浥鮫綃透。(痕紅 鮫靑透)

춘여구,인공수,누흔홍읍교초투。(흔홍 교청투)

    봄빛은 예와 같은데 사람은 부질없이 늙어 진한, 눈물 흔적 손수건에 배어났네.

 

桃花落,閒池閣。山盟雖在,錦書難托。

도화락,한지각。산맹수재,금서난탁。

    꽃이 진 한가로운 연못가에 태산 같이 굳은 약속 편지도 전할 수 없어졌지.

 

莫!莫!莫!

막!막!막!

    생각말자, 생각 말자, 생각을 말자꾸나.

 

 

 

 나는 마음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이어지는 뒷부분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계속하겠습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