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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3 중국-절강성:화려한 남방(完)

소흥에는 황주와 공을기가 있다

by 깜쌤 2013. 3. 1.

돌로 포장한 길 양쪽에 붉은 깃발이 가득했습니다. 가게 이름은 소흥황주성입니다. 소흥(紹興)은 이름 그대로 도시 이름입니다. 다른 의미로 본다면 송나라의 12대 황제인 고종 통치시대의 연호이기도 한데 소흥 1년이 서기 1134년에 해당합니다. 황주(黃酒)는 소흥을 대표하는 술이 아니던가요? 성(城)은 이름 그대로 성이니 소흥을 대표하는 술인 황주를 파는 커다란 점포라는 뜻이 되겠지요. 

 

 

술가게치고는 규모도 장난 아니게 클 뿐더러 시설도 으리으리합니다. 촌놈 눈 돌아가는 소리가 자갈밭에 우마차 지나가듯이 크게 울릴 정도입니다. 수호지 정도는 다 읽어보셨겠지요? <삼국지연의>,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를 중국사대기서라고 부른다는 것은 상식입니다만 수호지를 읽어보면 술 좋아하는 호걸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합니다.

 

수호지는 이름 그대로 물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모은 책입니다. 그 물가라고 하는 곳은 당연히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양산박이라는 곳인데 오늘날의 산동성 수장현 근처로 추정합니다. 추정한다는 말은 당시 수호지의 배경이 되는 송나라 시대에는 물이 가득한 광활한 습지로 유명했던 양산박이 이제는 육지로 변해버려 흔적조차 찾을 수 없기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수호지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대단한 인기를 끄는 사람이 바로 무송입니다. 그의 별명은 타호자(打虎者)인데 타호자라는 글자 속에는 '호랑이를 친 자'라는 의미가 들어있으니 무송이란 인물은 호랑이를 때려 죽인 사나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송이 경양강이라는 고개에서 식인 호랑이를 때려잡는 이야기와, 형을 독살한 요부(妖婦반금련과 간부(奸夫) 서문경을 해치우는 장면은 수호지안에서도 압권에 속합니다. 반금련과 서문경은 <금병매>속에도 등장하죠. 참고로 서문경의 성은 서(徐)씨가 아니라 서문(西門)씨입니다.

 

 

무송이 경양강이라는 고개를 넘어갈 때 무슨 술을 마시고 취했을까 하는 사실에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던 모양입니다. 호사가들은 말하기를 "삼완불과강"이라고 써붙인 주막에서 무송이 독주를 열여덟잔이나 들이켰다고 하는데 그 술이 아마 황주였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삼완불과강(三碗不過崗)이라는 말은 '석잔의 술을 마시면 언덕(고개)을 넘어갈 수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무송이 마신 술을 황주로 짐작하느냐는 것이 문제겠지요. 우리가 잘 아는대로 중국을 대표하는 술은 황주와 백주(白酒)입니다. 물론 과실주도 있고 맥주도 있습니다. 백주라는 말은 술색깔이 희다는 말이 아니고 투명해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인데 증류주에 속하는 술입니다. 정통 안동소주같은 술이 증류주에 속하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증류주는 알콜도수가 높습니다. 문제는 증류주를 만드는 기법이 원나라때부터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송나라 시대때 증류주인 백주같은 술이 중국에 존재할 수 없었다는 이론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중국집에서 파는 빼갈같은 고량주는 백주에 속하는데 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술 이야기를 하다보니 고량주를 확 확 들이켰던 젊었던 시절이 은근히 그리워지네요.

 

 

그러므로 무송이 들이켰던 술이 황주였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성립됩니다. 황주는 누룩을 발효시켜 만드는 발효주입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막걸리와 청주 중간쯤 되는 술이라는 것이죠. 황주라고 하니 술 색깔은 짐작이 될 것입니다만 나는 이번 여행에서 마셔보지는 않았습니다. 술을 안마시기 시작한 것이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참고로 홍주라고 하면 중국에서는 적포도주같은 그런 색깔을 지닌 술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황주의 알콜 도수는 14도에서 18도 사이라고 합니다. 일본 청주와 비슷한 수준의 도수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만 용도는 아주 다양합니다. 그냥 마시기도 하고 데워 마시기도 하며 요리를 하는데 넣기도 합니다. 황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중국 소흥에서 생산된 소흥주입니다. 우리는 지금 소흥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술가게 앞을 지나는 중입니다.

 

  

술가게 앞에서 사람좋은 웃음을 날리는 저 영감님은 과연 누구일까요? 소흥이라는 도시 이름과 영감님의 얼굴 표정, 그리고 손에 들고있는 자그마한 알갱이와 오른손 앞에 놓인 작은 접시를 보고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맞힐 수 있다면 그는 진정한 중국문학의 대가이며 고수일 것입니다. 힌트를 드릴까요? 성은 공씨이고 우리가 노신이라고 부르는 루쉰과 관계있는 인물입니다.

 

 

이 영감이 들고 있는 것은 콩입니다. 어쩌면 그 콩 이름은 회향두(茴香豆)일 것입니다. 회향두라는 콩은 이 영감과 확실한 관계가 있습니다. 노신이라고요? 노신과 이 영감은 관계가 있다고 했지 노신의 모습이 이 인물과 같지는 않습니다. 노신의 얼굴 모습은 앞글에서 이미 약간 소개를 해드렸습니다. 도저히 모르시겠다고요? 정답은.....

 

 

공을기(孔乙己)입니다. 노신이 쓴 단편소설 <눌함 공을기(吶喊 孔乙己)>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공을기라는 영감이죠. 위의 사진을 자세히 보면 안내판 거의 전부가 노신과 관계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노신의 흔적으로 가득한 거리로 들어갑니다.

 

 

바로 앞에 보이는 저 거리입니다. 하얀색 벽위에 검은 색 지붕을 인 2층 건물이 좌우로 줄지어 선 곳 말입니다.

 

 

우리는 방금 저 문지방을 넘어 들어왔습니다. 집으로 치면 문지방에 해당될 것이지만 거리이니까 차단시설로 봐야겠지요.

 

 

나는 이런 모습을 볼때마다 속으로 치밀어오르는 울화통 때문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자꾸 내가 사는 도시와 비교해보게 되는 것이죠. 경주를 대표하는 문인은 누가 뭐래도 김동리박목월입니다. 굳이 끌어대자면 유치환 선생도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만 그 분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꾸며놓은 시설은 불국사 부근의 동리목월기념관 정도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디어 빈곤이며 상상력 부족현상입니다. 그래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것은 우리들의 의식수준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동리 김시종 선생의 친형은 독립운동가로, 한학자로도 알려진 분입니다. 하지만 동리선생의 큰형인 범부 김정설(凡夫 金鼎卨)을 기억하는 분은 경주시민 가운데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려먹을 소재는 무궁무진하지만 스토리텔링을 할 줄 모르는 행정당국을 보면 분통이 터질 지경에 이릅니다.

 

 

소흥은 노신황주라는 술, 그리고 육유에 얽힌 슬픈 사랑 이야기와 동호의 아름다움과 왕희지라는 인물로 먹고 사는 동네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모택동의 동지로서뿐만 아니라 청렴하면서도 자애로운 총리라는 이미지로 중국 인민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버린 주은래의 할아버지가 소흥에 살았었다는 사실을 가지고도 그들은 두고두고 우려먹을 줄 압니다. 나중에 우리들은 주은래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장소에도 가게 됩니다.

 

 

길거리 좌우로 늘어선 건축물들은 휘파건축의 영향을 받은듯 합니다.

 

 

화분에 심겨진 소철까지도 그렇습니다.

 

 

모든 가게들도 흠잡을데 없이 깔끔했습니다.

 

 

나는 일본의 나가사키를 떠올렸습니다. 여기 분위기가 나가사키의 데지마 부근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노신이 살았다는 집입니다. 여기도 나중에 시간을 내어서 새로 들어갔습니다. 후에 찬찬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사람의 선각자 소설가를 두고 이렇게 추모하고 우려먹을 줄 아는 중국인들의 기질에 찬탄을 금하지 못할 지경입니다.

 

 

좋은 것을 주어도 써먹을줄 모르는 우리는 어쩌면 바보일지도 모릅니다.

 

 

정상회담의 댓가로 달러를 퍼주고 노벨 무슨무슨 상을 받았다고 자랑할 줄은 알아도 멋진 번역가를 길러내지 못해 노벨 문학상조차 받지 못하는 우리 현실을 보면 슬퍼지기까지 합니다.

 

 

좋은 구경을 하면서 나는 괜히 마음이 울적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늦어버렸기에 다른 날 다시 와서 구경을 할 생각입니다.

 

 

노신의 원래 성은 주씨였습니다. 그 이야기도 다음에 하겠습니다.

 

 

우리는 거리 끝까지 가보기로 했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져 버렸기에 다음 글에서 계속할까 합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