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처음으로 가본 곳은 승상사당(丞相祠堂)이라는 건물이었습니다. 이 마을이 특이한 것은 경관도 경관이지만 마을의 주요 지점마다 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물의 출처가 궁금했습니다. 어디에서 물을 끌어오는 것인지 아니면 거대하게 솟아나는 샘을 마을 안에 따로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너무 궁금해서 결국 중국 인터넷에 접속을 해서 자료를 찾아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도백과(百度百科)에 가서 자료를 검색해보았습니다.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baike.baidu.com/view/71087.htm
그랬더니 단번에 자료가 검색되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제갈퍌괘촌은 원래 고융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절강성 금화시 난계 서부에 있는데 제갈량의 후예들이 모여사는 마을치고는 제일 큰 동네로 알려져 있다. 마을의 건축물들은 팔진도의 모습을 따 배열되어 있는데 명나라 청나라시대의 건축물이 대량으로 보존되어 있어서 그 어떤 마을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녔다. 북위 29도 5분, 동경 119도 2분에 위치하고 있다.
결국 나는 바이두 백과를 펼쳐놓고 어설픈 한자실력을 총동원해서 씨름을 해야할 처지에 몰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모르는 말은 넘어가는 식으로 그렇게 끙끙대며 읽어본 결과 마을을 둘러싼 작은 산은 여덟인데 그곳에서 흘러온 물들이 마을로 모여들도록 설계를 했다는군요.
마을의 중심부는 다른 곳에 비해 낮고 사방은 높다는 것이죠. 마을을 둘러싼 낮은 야산이 여덟이요, 마을의 핵심을 이루는 종지(鐘池)라는 저수지에서 뻗어나가는 길이 다시 여덟이니 구궁팔괘진을 차용하여 마을을 설계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마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는 영화 한편을 새로 봐야할 처지에 몰리고 말았습니다. 오우삼 감독이 만든 영화 <적벽대전>이 바로 그 영화인데요, 영화 속에는 제갈량이 설계한 "구궁팔괘진"이라는 기묘한 진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잘못하다가는 여행기 한편을 쓰기 위해 <삼국지연의> 소설 전체를 새로 읽어야할지도 모르게 생겼으니 기가 찰 일입니다.
나는 논에 물을 대는 수차(水車)를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이 작은 골짜기 아래에 아까 우리가 걸어오며 구경을 했던 저수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수차의 모습도 혹시 제갈량이 아이디어를 내어서 만든 여러가지 시설물 가운데 하나를 차용한 것이 아닐까 싶어서 자세히 살펴본 것이죠.
삼국지연의 소설에 보면 제갈량이 개발했다는 다양한 병기들과 기구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혹시 그런 것과 연관이 없을까 싶어 살펴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동안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살펴본 바에 의하면 수차도 그 종류가 한없이 많더군요. 제가 그런 것까지 연구하는 전문가는 아니므로 섣불리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인간의 지혜는 끝도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참으로 많은 결점을 지닌 사람인데 그 중의 하나가 기계치라는 것입니다. 약간만 복잡한 물건을 주면 그 구조나 얼개를 잘 파악하지 못해 사용법을 익히는데 쩔쩔매기도 합니다. 그러니 기계장치를 보면서 구조를 파악하는 것에는 말짱 꽝인 셈이지요. 관심은 있으나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니 이런 기계를 보긴 봐도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승상사당 입구까지 왔습니다. 먼저 들어가서 구경을 했던 중국인 관광객들이 사당에서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습니다.
저수지 가에는 동네 아주머니가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아직도 옛날 삶의 모습들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가 비록 남쪽이라고는 하지만 겨울철에 찬물에 손을 담그고 빨래를 하는 것은 정말 고통스런 일입니다. 제 어머니나 아내는 겨울철이면 꽝꽝 얼어붙은 개울에 가서 얼음을 깨고 빨래를 했었습니다. 그게 바로 어제일 같습니다.
하얀 고양이 한마리가 자잘한 돌로 포장된 길거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승상사당에 들어가기전에 고개를 돌려 저수지 부근을 한번 더 살펴보았습니다. 네모지게 만들어진 저수지를 둘러싼 하얀 건물들이 참으로 이색적이었습니다. 인터넷으로 조사를 해보았더니 하얀색 벽에 검은 색 기와를 올린 이런 양식의 건물들을 휘파건축물이라고 한다고 하더군요.
절강성(위 지도에서는 저쟝성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바로 왼쪽 위에 안휘성(=안후이성)이 있습니다. 안휘성 남쪽에 휘주라는 도시가 있는데 그 도시를 중심으로 번져나간 건축물 양식을 휘파양식이라고 한다는군요.
승상사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작은 구멍가게에서는 팔괘와 연관이 있는 작은 물건들을 팔고있었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으니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냥 지나쳐갔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얀색 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건물 안으로 들어갑니다.
기와로 지붕을 덮은 처마 끝에서는 눈녹은 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처마밑에는 커다란 두멍을 놓아두고 물을 가득가득 받아두고 있었습니다. 화재가 발생할 때는 이런 물을 가지고 진압을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야 깨달은 사실인데 이 동네에서는 매사를 이런 식으로 비상상황을 대비하여 준비해두고 있었습니다.
승상사당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승상은 당연히 제갈량을 의미할 것입니다.
제갈양! 우리가 흔히 제갈공명으로 알고 있는 바로 그 분입니다. 후한 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촉나라의 재상으로 눈부신 활약을 했던 사람이라는 정도는 어지간한 남자들이라면 다 알지 싶습니다. 제가 이 여행기 속에서 굳이 <삼국지연의>라는 표현을 고집하는 이유는 역사가 진수가 쓴 <삼국지>와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소설은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역사는 사실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니 허구와 사실을 명확하게 구별해야 하는 것이지만 소설 속에 빠져들다보면 소설 속의 내용이 모두 다 진실인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므로 판단에 혼란이 오게 되지 않습니까? 역사소설이 가지게 되는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입구에 진열해놓은 근대문물에 해당하는 골동품(?)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던 사당과는 규모 자체가 다르더군요. 대문을 들어서면 회랑이 나옵니다. 회랑 안쪽에는 다시 큰 건물이 우리를 맞아주는데 손님 접대용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탁자와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회랑을 따라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제갈씨 문중을 빛낸 사람들의 조각상이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회랑 양쪽으로 그런 인물들이 즐비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중국사 공부를 한 분들이라면 한사람 한사람의 역사적인 존재가치를 잘 파악할 수 있겠지만 저같은 어리바리한 사람 눈에는 그사람이 그사람 같아서 이름만 한번 슬쩍 보고 지나치기로 했습니다.
조각상들의 모습이 제법 사실적입니다.
사당을 이루는 기둥을 모두 검은색으로 칠했더군요.
회랑 한구석에는 철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되는 종이 매달려있기도 했습니다.
물이 흐르는 공간에는 푸른 이끼가 끼어있어서 건물 안팎이 모두 고색창연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배치한 물건하나하나가 흐트러짐이 없어서 항상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이 글을 쓰던중 나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주문한 책이 내가 자주가는 커피가게에 도착했으니 찾으러 오라는 연락이었습니다. 나는 지체없이 커피가게로 쫓아갔습니다. 이 책 속에는 많은 사진들이 등장하는데 사진을 찍은 이는 북경사범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한 왕평(王萍 왕핑)이라는 여자였습니다. 글을 쓴 분들은 모두 중국인들로서 네명이 제갈량 편집팀을 이루어 공동작업을 한 것 같습니다.
정사(正史)에 기초를 두어 글을 쓰고 해석을 했다고하니 어느 정도 믿을 수 있을 것같습니다. 나는 당장 글쓰기를 중단하고 책읽기에 몰입했습니다. 참고할 지식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책에 빠져든 이유는 여행기 하나라도 우습게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행기 후반기에는 수호지와 관련되는 내용이 등장할 것 같아서 고우영씨가 그렸던 만화 수호지 24권짜리를 다시 주문했습니다. 예전에 모두 다 읽어본 책들이고 가지고 있었던 책들이지만 오래되어 너무 낡아서 더 보관할 수가 없었기에 폐기처분했던 책입니다.
나는 책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합니다. 문제는 제 지식의 분량이 너무 얕아서 함부로 아는 척 할 수 없다는 것과 특정 분야에 관해 깊이있게 전문적인 공부를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 여행기가 깊이가 없는 것이죠. 오늘 받은 책을 세밀하게 보아가면서 글을 계속해서 써나갈 생각입니다.
우리가 공명선생정도로 알고 있는 제갈량(諸葛亮)은 본관이 낭야 양도인 낭야 양도 제갈씨입니다. 낭야 양도는 산동성에 있습니다. 그분의 자가 공명이고 호는 와룡선생입니다. 와룡은 글자그대로 용이 누워있다는 정도가 되겠지요. 서기 181년 동한(東漢) 영제시절에 태어났으니 지금부터 1,800여년전에 활동한 사람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는 서기 234년에 죽었습니다. 섬서성 오장원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장원의 위치가 너무 궁금했던 나는 기어이 오장원에 찾아가보았었습니다. 제가 오장원을 찾아간 사연과 과정이 궁금한 분들은 아래 글상자 속의 주소를 눌러보시기 바랍니다. 고대사에서 장안으로 알려진 오늘날의 서안(西安)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부친은 제갈규, 모친은 장(章)씨인 것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3남2녀중 차남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형은 제갈근이고 동생은 제갈균입니다. 제갈량이 마흔일곱에 얻은 아들이 제갈첨입니다. 외동아들이죠. 제갈량이 서른 넷이나 되도록 자식이 없어서 들인 양자가 제갈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제갈교는 형인 제갈근의 둘째아들입니다.
사당 제일 위 건물에는 제갈량의 모습이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그의 키가 8척이었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큰 키인 180센티정도였을 것으로 봅니다. 당시의 한척은 22센티미터에서 25센티미터 정도로 본다고 합니다. 여포는 아마도 2미터를 넘어서는 거인이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옛날에는 키가 크고 덩치가 크면 일단 장군감으로 생각했는데 제갈량은 큰키임에도 불구하고 선비풍의 외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갈량이 들고있는 부채를 우선(羽扇)이라고 합니다. '깃 우'자를 쓰고 있으므로 새의 깃으로 만든 부채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갈량의 모습이 안치되어 있는 사당의 제일 높은 건물에서 아래를 본 모습입니다.
지붕위에서는 눈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여기는 낙수소리도 운치가 넘치더군요. 제가 그렇게 느낀 것은 사당의 분위기때문이었지 싶습니다.
제갈량을 모신 승상사당을 방문한 인사들 가운데는 중국의 전현직 고위관료들이 많더군요.
어느 정도 둘러본 우리들은 아래로 다시 내려갔습니다.
언제 온 눈인지는 모르지만 지붕위에 눈이 있어서 그런지 한결 더 깊은 멋이 풍겼습니다.
제갈씨 가문에만 내려오는 전통깊은 음식과 행사들도 제법 있는 모양입니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인물가운데 공명이나 관우는 이미 중국인들에게 신으로 다가서 있습니다. 최근에는 모택동도 일부 민중들에게 그런 식으로 비치는 모양입니다.
처마아래를 잘 보면 기둥 장식이 아주 세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각솜씨가 예사롭지 않더군요.
소설에 보면 제갈량은 깃털부채인 우선을 들고 수레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그것을 본뜬 것일까요? 좌거(座車)가 사당건물 한구석에 놓여있었습니다. 한번 앉아보려다가 참았습니다.
분향까지 할 일은 없어서 구경만 하고 돌아나왔습니다.
제갈승상 담장 너머로 마을의 지붕들이 조금 보였습니다. 휘파 건축물들은 참 단정하게 보입니다.
우리는 다시 승상사당을 나왔습니다.
관광객을 위해 안내표지판을 달아놓았으므로 그대로만 따라다니면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동네 골목이라는게 수상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는 곧 밝혀집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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