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초등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배낭여행기/13 중국-절강성:화려한 남방(完)

종지와 대공당

by 깜쌤 2013. 1. 29.

 

착시효과를 불러 일으킨 벽을 슬그머니 비켜서서 종지의 전체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진에는 아주 작게 나타나지만 종지 속을 자세히 보면 작은 우물처럼 생긴 둥근 구조물이 보일 것입니다. 빨래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진의 오른쪽 가운데 부분에 있습니다.

 

 

 

 

바로 위에 올려둔 이 사진은 중국 인터넷 바이두에서 가져왔습니다. 종지의 모습을 높은 곳에서 보면 우리나라 국기 한가운데 있는 태극처럼 그런 모습처럼 생겼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물이 차있는 부분과 마른 땅으로 되어 있는 부분의 넓이는 각각 전체 원의 반씩을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을의 한가운데에 종지가 위치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을을 둘러싼 작은 산이 8개라는 사실도 한꺼번에 알 수 있지요. 그러니 종지가 이 마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높고 큰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이 마을이 얼마나 교묘하게 설계되어 있는지를 쉽게 깨달을 것입니다. 

 

 

종지 물속에도 우물이 하나 있고 땅부분에도 우물이 하나 있으니 전체적으로 보면 두마리의 물고기가 서로의 꼬리를 물기위해 돌아가는 형상이 되었습니다. 땅에 있는 우물의 사진은 밑에 곧 등장합니다.

 

 

나는 땅부분을 향해 걸었습니다.

 

 

떠돌이 행상이 와서 전통과자를 파는듯 했습니다.

 

 

바로 밑에 있는 빨래터에는 할머니 한분이 세탁물을 가지고 손수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역이나 태극도설같은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런 마을을 구경해도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물과 땅을 구별하는 경계를 보면 축대를 휘게 하여 쌓았다는 사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습니다.

 

 

중국 시골에서는 과자조차도 무게를 달아서 팝니다. 심지어는 과일도 그렇게 하더군요.

 

 

파는 분이나 사는 분이나 모두 고령이었습니다.

 

 

그새 다른 할머니들이 가세하셨네요.

 

 

자, 이제 땅부분에도 우물이 하나 자리잡고 있음을 보셨을것입니다.

 

 

물고기의 눈에 해당되는 부분이 아닐까요?

 

 

바로 이 부근에 대공당(大公堂)이 있습니다. 원래는 제갈량 기념관 정도로 만들었다는데 나중에는 마을의 모임장소로도 사용된듯 합니다. 한때는 여성들의 출입은 제한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공당 건물 입구 외벽에는 충(忠)과 무(武)라는 글씨가 뚜렷합니다. 이 마을 사람들이 추구하는 정신적인 가치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종지와 똑같은 모양은 아니지만 물이 고여있는 저수지가 마을 속에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정확한 지형지물과 자기가 걸어들어온 과정을 기억하지 못하면 헷갈리게 되어 있습니다.  

 

 

물속에 우물 하나, 그리고 반대쪽 땅에 다시 우물 하나......

 

 

이 마을은 제갈량의 먼 후손이 되는 제갈대사라는 분이 설계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서기 1340년경에 이 곳에 정착했다고 하니 마을의 역사가 700년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죠.

 

 

골목길 탐방은 잠시 놓아두고 대공당 안으로 들어가서 구경을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입장권 한장만 가지면 마을 전체에 흩어져 있는 유적을 거의 다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붕에서 눈녹은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운데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사진속에 낙수(落水)가 흘러내리는 것이 조금 잡혔습니다. 계단 좌우에는 반드시 물두멍을 놓아서 물을 모았고 물두멍이 있는 곳 위의 지붕은 뚫려있었습니다. 참으로 교묘한 설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집이 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져 있더군요. 놓여진 화분 속에는 거의 예외없이 관음죽이 심겨져 파릇파릇하게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건물 안에는 길이가 조금 짧긴 하지만 회랑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도 특색이었습니다. 오른쪽 회랑 게시판 안에 제갈량집안의 가계도가 들어있더군요.

 

미리 소개해드리자면 대강 이런 모습입니다. 통계가 얼마나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만 바이두에 올라온 글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제갈씨는 약 1만 7천명 정도가 된다고 하네요. 그중에 이 마을에만 약 2,500여명에서 3,000명 정도가 사는가 봅니다. 오랜 문중의 역사치고는 후손들의 숫자가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제갈량의 첫째 아들은 제갈첨(諸葛瞻)인데 그는 큰아들 제갈상(諸葛尙)과 함께 촉나라를 지키기 위해 위나라 군대와 맞서 싸우다가 전사합니다. 제갈첨의 둘째 아들은 제갈경(諸葛京)인데 그후손들은 제법 오랫동안 이어져 옵니다.

 

 

당(唐)나라를 지나고 오대(五代)를 거치면서 명백을 이어온 후손 가운데 제갈량의 15대손인 제갈리(諸葛利)가 원래 근거지였던 사천성을 떠나 현재의 절강성 난계(蘭溪)에 흘러들어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제갈량의 후손들이 54대, 55대손까지 이어진 모양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저번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제갈량의 출생지는 산동성 기남(沂南)이었습니다. 산동성은 우리나라 인천 바다건너 맞은편이라고 여기면 됩니다. 글씨로 유명한 왕희지가 기남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이 개방화되어 관광업이 발전하게 되자 기남(沂南)현에서는 남아있는 제갈량의 유적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출생지라는 명분을 이용하여 관광특구로 개발하면서 여러가지 시설을 만들고 홍보작업에 들어갔던 것이죠.

 

그게 1990년의 일이었다는데 기남현에 제갈량기념관이 만들어져 문을 연다는 소식이 중국의 대중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지자 이를 본 제갈량의 후손들이 난계에서 연락을 해옴으로써 제갈량의 후손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 마을도 덩달아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대공당 안에는 계자서(誡子書)라는 글이 걸려있었습니다. 후손들에게 남기는 글인 모양입니다.

 

 

제갈량과 관련있는 고사들을 이야기하라면 아무래도 삼고초려라는 말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산동성 기남에서 태어난 제갈량은 어찌어찌하다가 양자강 중류에 자리잡은 호북성 양양부근의 융중에까지 흘러듭니다.

 

제갈량이 웅대한 포부를 안고 실력을 기르던 곳은 융중과 남양부근의 와룡강이라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품은 뜻은 컸지만 매양 실패를 거듭하면서 고단한 신세를 면치 못하던 유비가 공명의 소문을 듣고 세번씩이나 찾아갔다는 이야기에서 연유된 말이 삼고초려()라는 말입니다. 삼고초려 이야기의 진위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사실이든 가짜이든 간에 인재를 알아보고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유비의 정성만큼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외에도 제갈량과 관련있는 말들은 상당수가 됩니다. 수어지교(水漁之交), 읍참마속(), 설전군유(舌战群儒), 초선차전(草船借箭)등 별별 이야기가 다 전해내려옵니다. 하나하나 이야기를 다 꺼내려면 길어지니 아무래도 생략하는게 도리일 것 같습니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공명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곳이 있습니다.

 

 

한사람의 행적이 뭇사람들에게 이렇게 큰 영향력을 끼친 사례도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데에는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의 영향이 지대했었겠지요.

 

 

나는 발걸음을 돌려 되돌아나왔습니다. 입구쪽에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자관리인이 책상앞에 앉아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보통 관광객들은 이 정도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섭니다만 그러면 제갈팔괘촌의 핵심을 다 놓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정작 멋있는 구경은 대공당 뒤쪽 마을 안에도 상당히 숨어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골목 안쪽으로 탐험을 떠났습니다. 이 마을 안에서 볼거리는 무궁무진하게 많습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