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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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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살이/영상수필과 시 1 Photo Essay & Poem

어머니가 젊은 엄마였던 그날이 다시 있었으면 좋겠다

by 깜쌤 2012. 10. 22.

 

저녁에 전화를 걸때마다 내 가슴은 뛴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계셨는지, 혹시 어디 가서 넘어지지는 않으셨는지, 아침과 점심은 잘 드셨는지, 어디 편찮은데는 없는지 온갖 걱정이 다 되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조금만 힘이 없어도 걱정이고 전화를 조금만 늦게 받아도 걱정이다. 전화기 속으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일단 밝다면 오늘 하루도 잘 마무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지 않으면 괜스레 근심이 앞서게 된다.   

 

 

한반에 중학생 60명이 정원이던 시절, 나는 키큰 순서대로 줄을 서서 출석번호를 매길때 주로 2번과 6번을 했다. 중학교 1학년때는 6번, 2학년때는 2번, 3학년때는 6번이었다. 그만큼 작았다는 말이다. 초등학교 6학년때 통지표를 보았더니 키가 126센티미터였다. 그러니 얼마나 키가 작았던가? 몸무게도 30킬로그램이 조금 될까말까 했다.  

 

나는 그 키작은 몸으로 한시간 20분씩 기차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집에서 기차역까지 가는데 10분, 기차를 타고 가는데 1시간 20분, 기차역에서 학교까지 걸어가는데 다시 30분이 걸렸다. 아침 저녁으로 그렇게 했으니 학교를 다녀오는데만 꼬박 4시간을 쓴 셈이다. 기차통학을 했던 나는 어머니께서 꼭두새벽마다 일어나서 냄비에 해준 밥을 먹었다.

 

 

가스레인지도 연탄불도 없던 시절이어서 어머니께서는 내가 먹을 밥을 짓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러다가 석유곤로라고 하는 물건이 나왔다. 요즘 말로 하면 석유버너쯤 되리라. 석유버너위에 바닥이 얇은 양은냄비를 얹어 자작하게 해주신 밥을 먹고 다녔다.  

 

 

어머니께서 늦게 일어나신 날은 설익은 밥을 먹고 가기도 했다. 그 작은 키에 가방을 들었으니 가방이 길바닥에 닿을락말락 했다. 그렇게 해서 캄캄한 새벽부터 등교길에 나섰던 것이다. 반찬이라고해봐야 김치 몇조각뿐이던 시절이었다. 

 

 

피부가 탱탱햇던 젊었던 엄마는 이제 온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폐암으로 몇년째 투병중인 어머니는 이제 살도 많이 빠지셨다. 다시 한달만에 어머니를 뵈러 갔다. 기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았더니 어머니는 아들이 타고 올 기차를 쳐다보고 계셨다. 무궁화호 기차도 서지 않는 시골이어서 다음역까지 가야만 한다. 하루에 몇번밖에 오지 않는 시내버스를 타고 어머니가 살고 계시는 마을로 갔다. 

 

 

어떨때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좋아하는 칼국수를 만들어두시기도 한다. 그런 날은 나는 칼국수를 주는대로 먹는다.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시는 국수이기 때문이다. 맛이 문제가 아니다.

 

 

이번에 갔을때는 조선배추 몇조각과 어머니표 특제 된장과 밥과 김치를 주셨다. 나는 공기밥을 두그릇이나 먹었다. 더 먹으라고 권할때마다 나는 두말없이 먹는다. 어머니께서는 이 어리석은 아들에게  앞으로 몇번쯤이나 더 권할 수 있으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반찬삼아 먹는다.  

 

 

 

돌아올때는 다음 정거장까지 가서  기차를 탔다. 플랫폼에는 등이 굽어져가는 할머니 한분이 기차를 기다리고 계셨다. 어머니 모습과 겹쳐져 가슴이 아려왔다. 이젠 아내가 그런 어머니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 중이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