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행해 치솟아 오른 네개의 첨탑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두개는 경북지방 최초의 교회인 대구제일교회 첨탑이고 두개는 지은지 백년이 넘는 계산성당의 뾰족탑이다. 어느 쪽이 성당일까? 왼쪽 석조건물은 새로 옮겨간 대구제일교회다. 그렇다면 오른쪽 건물이 당연히 성당이 될 것이다.
계산성당 마당으로 들어가서 제일교회쪽을 본 모습이다. 이제는 확연하게 구별이 된다.
대구제일교회는 도로 건너편 약간 낮은 산위에 있다. 요즘 세상에서는 누가봐도 작은 언덕이지만 예전에는 산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남아있는 사진을 보면 저 곳은 작은 동산이었다.
성당과 교회 사이에는 도로가 있다고 보면 된다. 원래 제일교회가 저쪽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제일교회는 원래 성당 부근에 있었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 입장에서는 교회부근에 성당이 있었다고 볼 것이다.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이 성당마당이다. 계산성당이다. 이 성당에서 있었던 유서깊은 일 가운데 하나는 1950년 12월 12일, 고 박정희 대통령과 고 육영수여사가 대구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것이다. 1950년이라면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중이다.
성당 마당에는 많은 자동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보통의 성당건물들을 하늘에서 보면 열십자모양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안그런 경우도 당연히 있을 수 있다.
붉은색 벽돌로 지은 건물이다. 1902년에 지었으니 이미 건축한지 백년이 넘었다. 당시로 봐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획기적인 건물이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이 쓴 열기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청나라를 방문하면서 그가 받은 인상가운데 특별히 벽돌과 수레 사용에 대해 언급한 제법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벽돌집이 드물었다. 왜 그랬을까? 황토를 다져 네모나게 찍은 흙벽돌로 만든 집은 많았어도 불에 구운 벽돌집은 보기 힘들었다면 이는 당연히 생활수준에 문제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부터 100여년전에 이런 거대한 건물을 지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부근을 예전에는 계산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김수환 추기경도 이 계산성당에서 신부서품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어른은 출생지로만 따진다면 나와 동향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나는 성당 옆으로 이어진 마당을 따라 걸어서 정면으로 가보기로 했다.
작은 정원 앞으로 대구제일교회 신관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로 여기가 대구인들 신앙심의 성지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옛날 사진을 보면 계산성당 부근으로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개울이 흘렀다는 말은 빨래터가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랬던 곳이 이제는 다 사라지고 없다. 성당 뒤쪽으로는 매일신문사 건물이 자리잡았다. 성당 정문쪽에서 보면 신문사 건물은 왼쪽에 있는 셈이 된다.
성당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가 살아있어서 좋았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신앙심의 발로가 뾰족탑으로 나타났으리라.
이제는 이런 오래된 건물들이 역사를 증명하는 사적지가 되리라.
이제 정문앞까지 거의 다 왔다.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드디어 정문까지 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더니 성도 몇분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사진찍기가 미안해서 스테인드 글라스 구경도 포기하고 곧바로 돌아나오고 말았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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