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줍잖은 글이지만 그래도 쓰려면 자료가 필요해서 상화선생에게 얽힌 일화를 찾아볼까 해서 서재의 책들을 몇권 뒤져 보았지만 가치있는 내용들을 찾지못했다. 동아원색대백과 사전을 뒤졌지만 거기에도 가장 기초적인 자료밖에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인터넷 자료를 뒤져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것이 어설픈 시골 선생의 약점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스크랩을 해둔 자료를 뒤졌다. 그래도 선생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평범한 글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쓰게되는 것이니 참 처량하기도 하다. 차라리 안쓰는게 낫겠지만 그래도 찍어둔 사진이 있으니 어쩔 수없이 끄적거려본다.
내가 느끼는 이런 참담한 심정을 안고 상화 선생은 평생을 살았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분은 1901년 4월 5일생이다. 조선이 멸망하는 과정을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듣고 자랐을 것이다. 상화 선생은 1919년에 터진 삼일독립만세 운동때 대구에서 학생시위운동의 중심에 섰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백과사전에는 대구학생시위운동을 지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1908년에는 부친을 잃는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으니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상화선생 고택에 걸려있는 연보에는 1915년에 상경해서 중앙학교에 입학하신 것으로 되어있다. 중앙학교(지금의 중동학교)를 3년 수료한 뒤 금강산 같은 곳을 다니며 잠시 유랑을 했다고 한다.
1919년 3월에는 서울로 피신을 하게 되는데 대구에서 삼일운동을 주도하다가 사전에 발각된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서울로 피신한 상화는 고향 친구였던 박태원의 하숙집에 머물렀다. 박태원은 시인이며 소설가이셨다.
일본으로 건너간 상화는 동경에 있는 아테네 프랑세스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프랑스 유학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1923년에 발생한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여 조선인을 마구 학살하던 와중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해 귀국하여 시를 썼다. 우리가 잘 하는 <백조>동인이 된 것이다.
1936년, 상화선생은 중국으로 간다. 형 이상정(李相定)이 체포되어 투옥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구명운동을 위해 찾아간 것이다. 상화선생이 차남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정은 임시정부에 소속되어 항일전을 수행한 전력이 있었기에 상화 선생은 귀국하자마자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 이후 그는 대구에 설립된 교남학교(嶠南學校)에서 무료 강사를 하며 살았다고 한다.
상화선생은 타고난 스포츠맨이셨던 모양이다. 중앙학교에 다닐때는 야구를 하면서 명3루수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그랬기에 그는 교남학교에 근무하면서 권투부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권투를 배우게 했다고 한다. 일본 학생들에게 맞서기 위함은 물론 강하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으리라.
그런 활동을 하셨던 그 어른도 결국은 병마에 쓰러지고 만다.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의 일이다. 위암판정을 받은 그는 투병생활을 하다가 부인과 세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운명하셨다고 한다.
만나이로 치자면 42년을 조금 더 사셨으니 요즘 기준으로 치자면 요절하신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상화 선생의 고택을 여기저기 세밀하게 둘러보았다. 선생은 가셨지만 그분의 흔적은 남은 집이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선생의 부인은 1980년대까지 생존하셨다고 전해진다.
그가 영어와 작문을 가르치며 교직생활을 했던 교남학교는 현재의 대륜학교로 알려져 있다. 대륜학교는 현재 대구의 명문학교로 알려져 있다.
상화선생 고택은 윗채와 아랫채의 두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마 아래채가 사랑방 구실을 했던 모양이다.
책장에는 낡은 책들이 꽂혀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 한참동안이나 자세히 살폈다. 원효대사, 아라비안 나이트 같은 책들이 보였는데 꽂혀있는 책들 가운데는 이광수가 쓴 소설책들도 있었다. 누가 보았던 책인지는 모르겠다.
윗채의 모습이다.
장독대 밖에는 펌프가 보였다. 참 오랫만에 만나보는 물건이다.
돌확에는 물이 조금 고여있었다.
상화선생의 고택이 있는 이 지역은 지금은 대구의 중심지가 되어 있다. 그러니 이 집도 개발 열풍에 밀려 사라질뻔 했는데 시민들이 나서서 서명운동을 하고 보존운동을 펼쳤다. 결국 군인공제회에서 자금을 대어 상화고택을 사서 대구시에 기부체납을 했다고 한다.
장독대 부근에서 바라본 안채와 사랑채의 모습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집이 사랑채다.
상화고택을 지켜내기 위한 대구 시민들의 노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대문간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사랑채 바로 옆에 대문이 붙어있었다.
앞에 보이는 한옥은 서상돈 선생 고택이다.
대문 밖의 공간은 갑자기 21세기로 변했다. 나는 지금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0세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주상복합건물로 지은 멋진 고층건물 옆에는 몇그루의 소나무가 하늘로 솟구쳐 자라고 있었다. 높이로야 영원이 현대식 건물을 따라잡을 수 없겠지만 상화선생과 서상돈 선생의 기백은 하늘을 향해 치솟은 소나무처럼 고고하게 살아있을 것이다.
나는 먼저 살다가 가신 위인들의 삶을 통해 또 무엇인가를 배우고 느끼며 산다.
사람은 사라져도 흔적은 남는 것이다. 요절한 미남시인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에 등장하는 싯귀처럼 말이다. "사랑은 가도 과거는 남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남아있는 사진을 보니 상화 선생도 박인환 시인처럼 대단한 미남이셨다.
선생이 사셨던 고택으로 들어가는 골목에는 봄기운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빼앗긴 들에도 이제는 봄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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