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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1 중국-대륙의 극과 극:산동, 청해성(完

54광장에서 삼일운동을 찾다

by 깜쌤 2012. 2. 2.

 

 삼일절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답은 엄청 많다는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거의 다 아는 일이지만 외국인들은 거의 다 모르는 일이기에 해본 소리다. 그렇다면 삼일운동이 해외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중국과 상관이 있다는 정도는 세계사를 조금만 공부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수 있지 싶다. 

 

  

청도(靑島 칭다오)에서 삼일운동의 영향을 받은 현장을 찾았다면 거짓말일까?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아니라는 것이 정답이다. 좀 황당무계한 소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5·4광장의 의미부터 찾아보기로 하자. 무슨 연유로 청도시정부청사 맞은 편의 너른 광장이름을 5·4광장으로 이름붙여 놓았을까?

 

 

만주족이 세웠던 청(靑)나라가 멸망한 것이 1912년이다. 올해로서 딱 100년이 되었다. 중국 역사에서 마지막 황제는 너무나 유명한 애신각라부의라는 사람이다. 우리가 흔히 부의(溥儀 푸이)라고 이르는 황제다.

 

청이 멸망하고 난 뒤에는 군인들이 각지방을 차지하고서 지배자가 되어 횡포를 부렸는데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군벌이라고 부른다. 중앙정부의 힘은 약해지고 군벌이 횡횡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일종의 무정부상태나 마찬가지였다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 혼란의 와중에서 1914년 7월 28일 세계제1차대전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패전국이 되고마는 주요 핵심 동맹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과 독일제국, 그리고 늙고 병든 오스만 터키제국과 불가리아 왕국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들 모든 나라들은 패배했고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몰락하여 소국으로 남게되었고 독일도 패전해서 제국이 사라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오스만 터키제국은 해체되어 터키는 오늘날의 모습으로 쪼그라들고 말았다. 

 

 

이 여행기의 앞부분에서 이야기한대로 당시 청도는 독일의 조차지였는데 독일이 패전했으니 당연히 전승국인 중국에게로 돌아가야했지만 일은 그렇게 간단히 처리되지 못했던 것이다. 1차대전 중에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세력권이던 중국의 산동을 공격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은 독일이 중국에 가지고 있었던 이권이 탐났던 것이다. 청나라와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에 중국은 엄청나게 많은 이권들을 서양 여러 나라들에게 빼았겼는데 그것을 일본이 탐낸 것이다.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그것을 명분삼아 중국대륙 침략의 빌미로 삼아 산동과 만주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중국도 바보는 아니어서 각종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1차대전에 참가하여 전승국의 지위를 얻었지만 당시 새롭게 떠오르는 강자였던 일본이 누리고 있던 지위를 능가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1차대전을 처리하기 위해 모인 파리강화회담에서도 일본의 입김이 더 크게 작용하여 독일이 누리고 있던 거의 모든 권리를 일본이 이어받는다는 식으로 결정나고 만 것이다.

 

 

당시 중국의 실권자는 원세개의 뒤를 이은 단기서(段棋瑞 돤치루이)라는 인물이었는데  그가 이끄는 부패한 정부는 원세개가 일본과 밀약한 21개조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고 거의 그대로 받아주므로써 중국인들의 분노가 폭발하고만다.

 

 

21개조의 핵심내용은 독일이 가지고 있던 산동성의 이권과 요동반도에 있는 여순대련이라는 두 항구의 조차권과 남만주 지방의 철도부설권, 그리고 주요 지역의 철광과 탄광 경영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것이었다.

 

 

 

위 지도에서 분홍색 점이 찍힌 곳은 중국의 수도인 북경의 위치이고 빨간점은 청도의 위치를 나타낸다. 초록색 점은 대련을 나타낸다. 노란색 아라비아 숫자 1로 표시된 지역이 요동반도다.

 

 

이런 내용이 밝혀지자 분노한 중국인들이 들고 일어난 사건이 54운동이다. 1919년 5월 4일의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삼일운동은 그보다 약 두달전의 사건이니 이제 삼일운동과 5·4운동의 상관성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건 모두 일본의 야욕에 맞섰다는 것과 민중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는 것등이 상당히 닮은 내용 아니던가? 더군다나 파리강화회담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까지도 흡사하다. 일본에 침략당하여 나라까지 잃어버린 조선의 민중이 먼저 들고 일어났다는데에 중국인들은 충격을 받았으리라.  

 

 

5·4운동을 기념하여 이름 붙인 광장이 청도에 있다는 것은 역사의 순리이리라. 물론 사건이 처음 벌어진 장소는 산동성의 청도가 아니고 북경이지만.....

 

 

우리는 지금 독일 세력의 아시아 침략을 위한 교두보가 되었던 청도에 와있는 것이다.

 

 

그리고 5·4광장까지 와서 서있으니 어찌 감개가 무량하지 않겠는가? 우리 역사와 견주어 볼때도 상당히 의미가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5·4운동의 의의는 다양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중이 처음으로 역사발전의 주체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아울러 중국의 국민의식이 확립되어감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근대국민국가 형성의 분수령을 되었다는 점도 결코 간과하면 안될 것이다. 

 

 

 

5·4광장의 잔디밭은 크고 넓었고 깨끗하기까지 했다.

 

 

 

광장 좌우로는 고층 건물들이 즐비해서 현대적인 느낌을 주었다.

 

 

저 끝머리에 보이는 붉은 색 조형물은 다음에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즐비한 고층건물들은 주상복합건물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시정부청사 뒤쪽에 보이는 큰 건물을 구글 지도로 확인해보았더니 부신대하(府新大廈)라는 건물이었다. 물론 내가 갔던 당시에는 그 건물이 무엇인지 잘몰랐었다.

 

 

우리는 5·4광장을 따라 바닷가쪽으로 슬슬 걸어갔다.

 

 

광장 한가운데 부분에는 거대한 분수가 자리잡았다. 뿜어올리는 물줄기에 힘이 있었다. 마치 떠오르는 중국을 상징하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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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