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문학관 맞은 편이 목월문학관이다.
목월 박영종은 경주 모량사람이다. 경주사람들은 모두들 다 그렇게 알고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경남고성에서 출생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반드시 재확인이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그 구체적인 증거자료를 복사해서 붙여본다. 아래 네모칸 속에 들어있는 내용이다.
박목월(朴木月, 1916년 1월 6일 ~ 1978년 3월 24일)은, 대한민국의 시인, 교육자이다. 본명은 박영종이다. 1916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1935년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시《문장》에 〈길처럼〉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1946년 김동리, 서정주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했고,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을 간행하여 청록파로 불린다. 1953년 첫시집 《산도화》를 간행하고, 1962년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위키백과에서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기록했는지 모르겠다. 개인의 블로그나 카페같으면 그럴 수 있다고 여기지만 위키백과에서 그러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기사 목월문학관의 기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목월문학관 자료에는 1915년 출생으로 되어있는데 위키백과에서는 1916년생으로 기록해두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동아세계대백과사전에는 1917년 경주출생으로 되어 있다.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참 헷갈린다.
1938년에 결혼을 했다면 요즘 기준으로 보았을때는 일찍 결혼한 편이 되겠다.
1935년에 경주금융조합에 취직을 했다면 그의 나이 스무살때의 이야기가 된다. 사진속의 목월선생은 확실히 젊어보인다.
일단은 유순하다는 느낌부터 들었다.
계성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계성고등학교가 아닐까 싶다. 당시 경주에서 대구로 유학을 갈 정도면 공부를 상당히 잘 했거나 집안이 부유했거나 둘중 하나일 것이다.
가지런하게 꽂힌 습작노트의 수효가 제법 많았다.
친필원고도 모아두었다. 이젠 글을 쓰는 사람들도 원고지를 잘 사용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으니 친필원고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목월같은 이런 시인들은 행복하겠다. 세상을 뜨고난 뒤에도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있어 추모문학관까지 만들어준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복을 가진 분인가!
목월시인이 쓴 다양한 책들을 수집해두었다.
만년필이 눈길을 끌었다. 동리선생은 아피스 만년필을 쓰셨던 것 같은데..... 나도 아직까지 만년필을 쓴다. 남의 사인을 받을때나 서류에 내가 직접 서명할 일이 있을때는 가지고 다니는 꺼내서 애용하는 것이다.
한양대학교 근무 시절의 월급명세서도 보였다.
세로로 써진 성경책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내가 가진 성경책도 이제는 너무 낡아서 가죽장정이 다 낡아 헤어질 정도가 되었다. 괜히 자꾸 내것과 비교하게 되니 이것도 내가 가진 작은 교만이리라.
서재에 가까이 두었던 사진과 시계라고 한다.
연필과 볼펜과 만년필.......
그가 남긴 시들도 소개되고 있었다.
'만술아비의 축문'이라는 시에는 경주지방 사투리가 스며들어 있었다. 같은 경상도라고 해도 안동사투리와 대구사투리와 경주사투리는 조금씩 다르다.
이렇게 여러가지 자료를 모아두니 한세대를 풍미했던 시인이나 소설가를 이해하기가 참 편했다.
주인이 잠시 외출한것만 같은 서재의 모습이 정겹기만 했다. 시인이 곧 돌아오실 것만 같았다.
목월선생은 한국식 서재를 갖고 계셨던가보다.
책장 제일 아래쪽에 가득한 노트들이 시인의 치열한 창작정신을 말해주는듯 하다.
입구쪽으로는 그의 시집이 전시되어 있었다.
청록집과 산도화이다.
이런 책들은 정말 진귀한 것들이다. 원본을 가지고 있다면 가격도 상당하리라.
목월선생을 문단에 등장할 수 있도록 추천해준 분은 시인 정지용이다. 정지용은 향수라는 시로 유명한 시인이다.
수석도 몇점 가지고 계셨던 모양이다. 그리 썩 좋은 수석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이런데서 목월의 순수한 마음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아있는 유품으로만 본다면 상당히 검박한 인생을 사신 것 같다.
취미로 우표수집도 조금 하셨던가 보다.
1950년에 발간했다는 여학생이라는 잡지가 보였다. 학원이라는 잡지만 기억하는 나에게는 처음보는 책이었다.
그분은 아동문학에 관해서도 순수한 열정을 지니셨던 분인것 같다.
이제는 모두 전설이 되어버린 책들이 제법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문학관을 나오며 유리창 너머로 토함산자락을 살펴보았다. 세월이 가면 자연도 그 모습을 바꾸고 대지에 발붙이고 살았던 인간들도 모두 사라지는 법이지만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이름만은 남는 법이다. 하기사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사라지면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나는 종종걸음으로 문학관을 빠져나왔다.
토함산으로 올라가는 도로와는 걸어서 드나드는 길도 편하게 연결된다. 나는 아까 이 길로 걸어들어왔다. 봄날에 여기를 찾아온다면 사방에 가득한 목련과 벚꽃을 볼 수 있으리라.
산골 눈먼 처녀가 문설주에 귀대이고 봄이 오는 소리를 듣고자 했던것처럼 나도 봄이 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아직도 가지에다가 자신의 열매를 듬성듬성 달고있는 녀석이 보였다.
그런데 나무 열매가 꽃처럼 예뻤다. 잘보면 장미꽃을 닮은 열매가 보일 것이다.
나는 불국사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시내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였다. 시와 소설의 현장을 살펴본 날은 무엇보다 마음이 부르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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