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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목월 문학관 2 - 김동리 선생은 이렇게 사셨다

by 깜쌤 2012. 1. 27.

 

입구에서 봤을때 왼쪽에 동리선생의 문학관이 있다. 나는 김동리 선생 문학관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사실 동리선생이  목월선생보다 연배이다. 동리선생은 1913년생이고 목월선생은 1915년생이다. 

 

 

김동리 선생의 본명은 창귀이고 자가 시종이다. 1913년 생이니 이제 탄생 100주년이 다 되어 간다. 젊었을때의 모습이 단아하게 여겨졌다. 일제치하 시절의 사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모친은 허임순 여사인데 경주제일교회를 섬기시며 권사 직분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연보가 자세히 나와 있었다. 호적에 올라간 이름이 창귀이고 자가 시종이라고 한다. 연표에 나타나있는 사건중에서 특이한 것이 하나있다. 1942년에 '범부 선생이 구속되고 가택수색을 당하자 절망과 분노를 안은 채 해방이 될때까지 절필'을 했다고 하는데 범부 김기봉선생은 동리선생의 큰형이 되는 분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첫째 부인이 김월계 여사였단다. 그렇다면 <창포 필 무렵>이라는 소설로 유명한 소설가 손소희여사와는 재혼했다는 이야기가 되는가 보다. <창포 필 무렵>은 대학다닐 때 읽어보았다.

 

 

 

동리 선생의 상이 보였다. 

만년의 모습인가 보다.

 


작품과 유품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기에 하나씩 세밀하게 살펴보았다.

 

 

김동리선생의 대표작이라면 아무래도 무녀도(巫女圖)가 아닐까 싶다. 문학관 안에도 무녀도의 일부분이 게시되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낭이와 욱이와 모화가 살았던 동네는 어디였을까? 성밖으로 오리쯤 나가서 있는 조그만 마을이라면 도대체 어디였을까? 나는 그게 궁금해서 경주의 옛날 모습을 담은 사진을 내가 디지털 카메라로 다시 찍은 사진자료를 뒤적거려보았다.  

 

 

해방후의 경주모습이니까 무녀도의 배경이 되는 마을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러다면 어디일까? 김동리선생의 생가는 성밖에 해당하는 마을인 오늘날의 경주시 성건동에 있다. 당시 동리선생의 생가 부근에 여러 성을 가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사는 동네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모화가 살았던 동네는 위 사진에서 보는 것같은 분위기였을지도 모른다. 여기는 분명히 경주읍성의 밖에 자리잡은 동네다. 오늘날의 대릉원부근인데 성밖에서 오리 정도는 안되는 거리이니 여기도 아니었을 것이다.

 

 

동리선생의 모친은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나중에는 권사라는 직분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리의 큰형이 범부선생이었다는데  큰형이 경주에서 신동으로 소문났었다고 한다. 동리선생의 부친은 농사도 짓고 어물장사도 하셨던 것으로 그를 아는 분들이 전했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 욱이가 가있던 것으로 무녀 모화가 믿고 있었던 절은 기림사로 알려져 있다. 기림사는 경주에서 감포로 가는 큰 고개인 추령너머 함월산 산자락에 있는 큰 절이다. 기림사 들어가는 도로 언저리 산기슭에 선무도로 유명한 골굴사가 있다.   

 

 

모화가 살제로 살았던 동네가 어디였든 간에 무녀도라는 작품이 젊은 날의 나에게 준 영향은 큰 것이었기에 그동안 쭉 관심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경주에 수십년을 살면서도 정작 경주사람들은 향토를 빛낸 문인(文人)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을 늘 안타깝게 여기며 살았는데 드디어 몇년전에 문학관이 만들어져 너무 기뻤던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제일 아래의 문장 속에 등장하는 봉창이라는 말을 과연 알아차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입시공부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이런 문학작품조차 읽을만한 시간적인 여유를 갖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모화가 굿을 벌이는 장소는 예기소 혹은 애기소로 알려져 있다. 동리선생의 생가가 있는 성건동에서 조금만 나오면 형산강이 흐르고 그 한모퉁이에 사건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바로 아래 사진 속에 나오는 장소가 예기소 혹은 예기청소(=예기청수, 애기청소, 애기청수)라고 부르는 곳이다.

 

 

 

 

 

모화가 굿을 했음직한 장소에는 낚시꾼이 대물 고기를 걸기위해 릴대를 좌르르 펴두고 있다.

 

 

 

이런 장소에도 김동리의 무녀도에 관한 안내판 하나 정도는 붙여두면 좋으련만 콧배기도 보이지도 않으니 도대체 관심이 없는 것인지 무식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무녀도를 장편으로 개작한 것이 을화라는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한단다. 문학관 속에는 소설 을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동리 선생이 사용하시던 책상인가 보다.

 

 

그 분의 서재를 그대로 옮겨온 것일까? 이런 물품들을 보니 내가 동리선생의 서재에 와 있는듯이 여겨졌다. 

 

 

다양한 자료를 모으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터인데 참으로 골고루 수집해 두었다.

 

 

손소희선생의 문학전집도 보였다.

 

 

동리선생이 쓰시던 시계들이다.

 

 

이런 노트는 나에게도 제법 익슥한 것들이다. 제일 오른쪽에 보이는 제품은 나도 애용했었기 때문이다.

 

 

김동리선생이 어머님의 사진을 평생 화장대에 놓아두었다고 한다. 모친이 아마 굉장히 총명하셨던 모양이다. 큰아들인 범부선생이 외우는 사서삼경을 다 외워서 아들이 틀리게 외우면 바로잡아 줄 정도였다니 말이다.

 

 

소설집 황토기도 보였다. 확실히 글을 쓰는 사람은 위대하다. 글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김동리선생을 이렇게 기억해주랴?

 

 

글재주를 타고난 사람들을 보면 너무 부럽다. 나와 중고등학교 동기동창 친구 가운데에도 아주 유명한 문인이 있다. 그 친구의 작품이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였으니......  진보쪽 인사들이 그렇게 '수구보수꼴통'이라고 매도하는 소설가 이문열 선생은 한번도 뵌적은 없지만 어쨌거나 간에 고등학교 선배이시다.

 

 

나는 서서히 치밀어오르는 아련한 감정을 안은채로 김동리 문학관을 나왔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