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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1 중국-대륙의 극과 극:산동, 청해성(完

공림 - 공자가 묻힌 곳 3

by 깜쌤 2011. 12. 21.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의 묘가 공자의 손자인 공급(孔伋)의 무덤이라는 사실은 저번 글에서 밝혀두었다.

 

 

지금 보는 공자의 손자인 공급, 즉 자사(子思)의 무덤 뒤에 공자의 무덤이 있다고 보면 된다. 

 

 

무옹중의 인상은 무시무시하다.

 

 

문옹중은 인자하고 자애롭다고나 할까?

 

 

공급에 관한 설명이 보였다. 공자의 적손으로서 전국시대의 저명한 철학가로 규정해두었다. 공씨 문중에서는 자사를 삼세조로(三世祖)로 모신다고 한다. 1세, 2세, 3세라고 하니 나는 자꾸 진시황이 생각났다.

 

천년만년을 두고 자기의 후손이 권력을 이어가라는 뜻으로 자기는 시황제(始皇帝)가 되고 그의 아들은 2세 황제, 또 그밑에는 3세 황제가 되어 영원히 통치해나가기를 바랬지만 그의 꿈은 3세 황제까지의 15년 통치로 끝나고 말았다.

 

'문(文)은 무(武)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있다. '펜이 총보다 강하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겠다. 공자 가문은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었는데 그 영향력은 진시황 영정 -진나라 임금 집안의 성은 이고 그의 이름은 이었다 - 일족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참으로 대단한 집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사의 무덤을 나와 앞으로 보면 무덤이 하나 보이는데 그게 바로 공자의 아들 공리(孔)의 묘소이다. 는 잉어를 의미한다. 사진이 조금 흐릿해지고 말았는데 길 끝머리에 바로 보이는 무덤이다. 공자의 무덤은 그 왼쪽 뒤에 있다고 보면 된다.

 

 

공리! 기원전 532년에 출생해서 기원전 482년에 죽은 인물이다. 아버지인 공자가 479년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니 아들이 아버지보다 약 3년 먼저 죽은 셈이 된다. 자식을 먼저 보냈으니 공자의 슬픔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안내문 내용으로만 본다면 그는 효자였던 셈이다.

 

 

공림 부근을 흐르는 하천의 이름이 사수(泗水)라는 강이다. 공리는 나중에 사수후(泗水候)로 추존되었다. 사수후라는 글자가 보이는 비석이 있는 묘가 공리의 묘이다.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영화감독 가운데 한사람이 장이모우(張藝謨 장예모)감독이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가 <붉은 수수밭(紅高梁 Red Sorghum)>이라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배우가 공리(巩俐)다. 공리(巩俐)와 공자의 아들 공리(孔鯉)는 우리말로 적을 경우에는 발음이 같지만 한자는 완전히 다르다.

 

 

공리의 무덤 바로 옆 살짝 뒤에 공자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 속의 무덤이 공자의 무덤인 것이다. 그러니까 공리의 무덤이 사진 속에서는 오른쪽 조금 앞이라는 말이 된다.

 

 

비석에 씌여있는 글자는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이다. 자세히 보면 제일 아래의 글자는 방패 간(干)자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얄미울 정도로 놀라운 세밀함이 숨어있는 것이다.

 

 

 

다른 쪽에서 봐도 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임금 왕이라는 글자임을 알 수 있다.

 

 

이제 확실히 보인다. 왕자의 중간에 자리잡은 세로 막대기를 길게 늘여서 얼핏보면 방패 간(干)자처럼 보이게 해둔 이유는 무엇일까? 저번 글에서도 이야기를 한바 있지만 공묘와 공부, 그리고 공림에는 많은 황제들이 방문을 했었다. 황제들뿐만이 아니다. 권문세가들이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다녀갔던가?

 

그들이 공자에게 가지는 질투심과 시기심은 어느 정도였을까? 괜한 오해를 사서 비극이 닥칠 것을 두려워한 후손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무덤 앞을 가로지른 담장의 높이를 교묘하게 조정하여 임금 왕(王)자가 '왕'자로 보이지 않게 한 것이다.

 

 

공자의 무덤에는 잡초가 가득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비석이 깨어진 흔적이 보일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국을 세운 모택동이 권좌에서 밀려날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홍위병(紅衛兵)이라고 이름붙인 철없는 아이들을 동원해 전통문화를 파괴한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홍위병이 극성을 부릴때 공자의 묘소도 안전하게 넘어가지 못했다. 공림도 습격을 당해 공자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비석은 파괴되었으며 수많은 자료를 보관했던 공부와 공묘의 자료조차 심각하게 훼손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모택동의 업적을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고 해서 인정을 해주는 분위기지만 우리나라는 건국의 초석을 놓은 분들에 대해 그렇지 못하다. 왜 그런 것일까?

 

 

공자의 제자로 자공(子貢)이라는 분이 있다. 공자의 제자로서 뛰어나 학식을 가진 일흔두명 가운데 한분으로 알려져 있는데 공자와는 혈연관계가 없다. 그는 자기 스승이 죽자 묘소 옆에서 삼년을 살며 스승을 기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공이  스승을 기리며 삼년간 시묘살이를 했던 곳이다.

 

 

 자공에 관한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대강 어떤 곳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공자의 묘소에서 그리 멀지 않다. 바로 곁은 아니고 한 이삼십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고 보면 된다.

 

 

이제는 돌아서 나갈 시간이다.

 

 

공자의 묘소를 뒤에 두고 돌아나간다. 위대한 성인의 자취를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공자와 맹자의 흔적을 이렇게 찾아온 것만 해도 그게 어디랴 싶었다.

 

 

홍위병의 난동으로 인해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당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자의 명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사람의 일생이 이다지도 남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면 분명 그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사진 속에는 공자의 무덤과 그의 아들인 공리의 무덤이 한꺼번에 다 나타나 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참배를 하고 갔다.

 

 

어떤 분들은 이 자리에 꿇어앉아 큰 절을 드리기도 했다.

 

 

나도 그의 묘소 앞에서 옷깃을 여미었다. 서로의 이상과 생각과 사상과 종교는 다를지언정 공자는 내 생각과 세상살이에 큰 영향을 준 분임에는 틀림없다.

 

 

그와 나는 이천오백여년의 시차를 두고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공통적인 생각을 가진 부분도 많다.

 

 

예컨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가르침은 동서고금 모두가 동일한 것이리라.

 

 

공림에 가득한 나무들은 역사의 흐름을 거의 살펴보았으리라.

 

 

나는 벤치에 잠시 앉아쉬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자공이 심은 나무가 이 부근에 있는 모양이다. 

 

 

참으로 대단한 곳이었다.

 

 

나는 그렇게 공묘밖으로 나와서 번잡한 세상속으로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