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보았더니 온 대지에 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고추밭에 뽑아서 정돈해둔 고추대 위에도 보얗게 내렸다. 오늘은 날씨가 푸근해질 것으로 짐작했다. 대지를 뒤덮은 서리를 보는 것이 도대체 얼마만이던가?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아 집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은 마을에는 벌써부터 햇살이 들었다.
서리가 얼마나 잘 내렸는지 얕은 눈이 온듯했다.
김장배추 푸른 이파리들 위에도 가득했다.
밭에 심은 대파 퍼런 줄기에도 소복이 내려앉았다.
아예 하얗게 가득 묻었다.
예술 작품도 이런 작품이 없다. 나는 다음(DAUM) 국어사전에서 서리를 찾아보았다. '대기 중의 수증기가 지상의 물체 표면에 얼어붙은 것. 땅 위의 표면이 복사 냉각으로 차가워지고, 그 위에서 수증기가 승화하여 생긴다.' 서리가 발생하는 원인과 과학적인 원리를 간단히 설명해 두었지만 나같은 둔재는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참으로 오랫만에 외삼촌을 뵈러 갔다. 산으로 난 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서 갔다. 길가의 고추밭에 올라가 보았다. 비닐에는 서리가 잘 묻지 않는가 보다.
응달쪽에는 아직도 서리가 녹지않고 있었다. 서리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히 자라는 파란 어린 보리새싹이 겨울 정취를 북돋우어 주었다.
골짜기를 따라 북으로 뻗은 기찻길이 아득히 산모퉁이를 감돌아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런 경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하는 사람이다. 흙에 가득 담긴 시골 내음을 맡을 수 있다는게 나에게는 자잘한 행복 조각으로 다가온다.
옴팍 파인 산골짜기에 자리잡은 시골동네의 교회 뾰족탑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생각나게 했다.
나처럼 모자라고 재주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바보가 어쩌다가 하나님을 섬기는 작은 일꾼이 될줄은 정말이지 어린 시절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단한번 살고가는 인생길에서 지금까지 살아오며 후회되는 일도 많이 겪었지만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된 것에 대해서만은 후회하지 않는다.
작은 개울가에 소복하게 떨어진 나뭇잎들마다 서리가 묻어있었다. 서리도 종류가 많아서 우리 조상들은 여러가지로 분류를 했다. 약간 연하게 내리는 서리를 무서리라고 했는가하면 좀 세게 빡빡하게 내린 서리는 된서리라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 내린 서리는 된서리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서정주님이 쓴 시 <국화옆에서>를 모르는 분은 거의 없지 싶다. 마지막 연에 무서리라는 낱말이 등장한다. 잠시 소개해보자.
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
물기가 많은 어지간한 먹거리 채소들이나 식물들은 서리를 맞으면 물러지고 만다. 수분이 부족해서 곯아버리는 녀석들도 있지만 대개는 서리를 맞으면 흐물흐물해지면서 녹아내리는 것이다. 봉숭아같은 존재들은 기온이 내려가면 슬슬 고스라지기 시작하다가 된서리라도 맞으면 영락없이 물러버린다.
자기가 견딜 수 있는 한계기온을 넘어서면 거의 예외없이 죽게되어있다. 그런 면에서는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저체온증이라는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영화 <타이타닉>에 보면 차가운 대서양에 빠진 사람들은 곧 숨을 거두는 것으로 묘사된다. 틀린 것이 아니다. 빙산이 둥둥 떠다닐 정도의 차가운 바닷물에 빠졌는데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헤엄을 치면서 버틸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다.
국화는 서리를 맞으면서도 꽃을 피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조상들은 국화를 사군자(四君子) 가운데 하나라고 치면서 그렇게 사랑을 해왔던가 보다. 도랑을 가로막은 작은 보 아래에 갈대가 무리지어 자라고 있었다. 갈대와 억새는 완전히 다른 종류다. 갈대잎에도 서리가 묻은듯 했다.
길가에 작은 농막이 보였다. 21세기답게 비닐로 지었다.
농막 속에는 관리기와 퍼런 호박 몇개, 그리고 비료포대가 보였다. 비를 맞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관리가 된다.
도랑물에 살얼음이 끼어있었다. 가볍게 살짝 얼어붙었다. 응달쪽에는 서리가 아직도 녹지않고 남아있었다.
무엇을 심은 것일까? 마늘은 확실히 아니다. 양파가 저렇게던가? 아닐 것이다. 된서리를 맞고도 살아남는다는 것은 참으로 강인한 존재다.
산골짝 작은 논배미에는 벼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가을비가 자주내리면 추수할 시기를 놓쳐버린다. 젊은 사람이 거의 없는 시골이므로 이제는 기계힘으로 벼를 베어야 하는데 비가 자주 와서 논바닥이 질게되면 트랙터같은 기계가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추수할 시기를 잃어버리게 되고 아직까지 논에 그대로 남아있는 벼가 생기게 된다.
벼이삭에 서리가 가득 내렸다. 다 여문 알갱이에는 서리가 내려도 녹아내리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나는 마음이 안스러워졌다.
소나무같은 침엽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활엽수들은 이제 거추장스러웠던 옷을 활활 벗어던졌다. 그들이 가지는 특유의 강인함으로 다가오는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이겨낼 것이다. 서리는 어쩌면 매서운 추위와 피부를 도려낼듯이 휘몰아치는 칼바람을 대비하도록 단련시켜주는 신의 은총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 마음에 낀 살얼음과 서리를 녹여없애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살아온 날들보다가 남은 날이 적은 것이 확실하기에......
대지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사는 거목같은 존재가 되기에는 이미 글러버린 인생이지만 남은 나날이나마 열심히 살아가고 싶다. 된서리를 이겨내고 말이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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