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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야생화, 맛/경주 돌아보기 Gyeong Ju 1 (完)

왜 이렇게 닮은 무덤이 만들어졌을까? 1

by 깜쌤 2011. 11. 3.

 

흥덕왕은 서기 826년에 즉위하여 836년경에 승하한 임금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약 1200여년전의 사람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흥덕왕이 누구인지 잘모른다면 해상왕 장보고를 떠올려보면 된다. 장보고가 활동하던 당시의 임금이 흥덕왕인 것이다. 

 

왕릉은 경주시내에서 제법 떨어진 안강읍 외곽의 야트막한 산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흥덕왕릉을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어디에서 이런 무덤을 본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 정상이다. 만약 괘릉을 먼저 보고온 사람이라면 데자뷰(deja vu) 현상을 경험할 수 있겠다. 데자뷰를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already seen이라고 할 수 있겠다.   

 

 

괘릉과 어딘가 닮은듯한 무덤! 그곳이 흥덕왕릉이다. 괘릉은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7번국도를 따라 15킬로미터 정도 가다보면 길가의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왕릉의 주인은 서기 785년에 즉위하여 798년에 죽은 원성왕(元聖王)이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원성왕이 죽고난 뒤에 임금자리에 오른 사람은 소성왕이고 그 다음이 애장왕, 그 다음이 헌덕왕, 그 다음이 흥덕왕이다. 삼십여년 사이에 임금이 몇번이나 자주 바뀌었다는 말은 정변이 자주 일어났다는 말이 된다. 귀족과 왕족사이에 다툼이 많았으니 고달팠던 시대를 산 사람들이다. 

 

 

뒤틀리고 꼬부라진 소나무들이 왕릉가에 즐비하다. 대낮에 들어가도 조금 어두컴컴하게 느껴질 정도로 숲그늘이 진하다. 원성왕릉으로 짐작하는 괘릉주위에도 소나무 숲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산의 높이와 위치가 흥덕왕릉이 위치한 곳과 제법 흡사하다.

 

무덤이 자리잡은 위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신라의 왕릉가운데 초기의 것들은 시내에 위치한 것이 많은데 통일 후 하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외곽에 자리잡은게 제법 된다. 거리만을 따져도 흥덕왕릉이 있는 이곳 안강까지의 거리가 시내에서 괘릉까지의 거리와 비슷할 것이다.   

 

 

무덤의 구조도 아주 흡사하다. 저 멀리 왕릉을 두고 왕릉 앞 좌우로 문인석과 무인석이 자리잡은 것도 비슷하다.  괘릉의 조감도를 보기로 하자. 바로 아래 사진이다.

 

 

2010년 5월, 괘릉에 갔을때 안내판에서 찍은 사진이다. 2번으로 표시된 곳이 석상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번에는 흥덕왕릉으로 가보자.

 

 

어찌 구조가 비슷하지 않은가? 물론 봉분을 둘러싼 구조물도 아주 많이 닮아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내가 서있는 앞쪽 좌우에 무인상이 있고 안쪽에 문인상이 서 있다. 물론 괘릉도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제 무인상부터 찬찬히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흥덕왕릉의 무인석이다.

 

 

왼손에는 거대한 몽둥이 비슷한 것을 들고 있다.

 

 

오른손은 주먹을 쥐고 가슴에 대고 있는 자세를 취했다.

 

 

이번에는 괘릉 무인석상의 자세를 보자. 무기와 주먹모습, 전체적인 자세가 흥덕왕릉의 석상과 제법 닮았다. 어느 것이 괘릉의 사진이고 어느 것이 흥덕왕릉의 사진인지 혼란스러운 분들은 사진에 들어있는 파란색 서명을 보면 쉽게 구별할 수 있다.

 

 

흥덕왕릉 석상의 얼굴 표정은 아무리 봐도 우리나라 사람 얼굴이 아니다. 괘릉에 관한 글을 쓰면서도 언급을 했지만 1200년전 사람들의 얼굴 모습과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의 얼굴 모습이 똑같다고 단정하는 것은 조금 섣부른 감이 있다.

 

하지만 너무 앞질러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남아있는 고구려인들의 얼굴표정을 통해 당시 한반도와 만주지방에 살았던 사람들의 얼굴 모습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근거로 살펴볼때 이 무인석상의 얼굴은 신라인으로 보기에 무리가 따른다는 말이다.  

 

괘릉의 무인석상 얼굴 모습이다. 흥덕왕릉쪽이 조금 부드럽다는 느낌이 든다.

 

 

흥덕왕릉 무인의 뒷모습이다. 잠시 괘릉 무인의 뒷모습과 비교해보자. 머리띠의 모습과 매듭을 유심히 살펴보자.

 

 

괘릉 무인의 뒷모습이다. 전체적인 스타일면에서는 흥덕왕릉의 무인석과 어딘가 닮아있다.

 

 

이 정도만 하면 괘릉과 흥덕왕릉과는 정말 많이 닮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어리바리한 내가 봐도 너무 닮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둘 다 시기적으로 신라하대(下代)에 속하니 양식이 비슷할 수밖에 없겠다. 혹시 제작하는 장인이 선후배간이거나 같은 문파였거나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시대의 조류라는 면에서 볼때 유사점이 있었던 것일까? 

 

 

혹시 석상을 제작할 당시 모델이 꼭 필요했었다면 모델이 되어준 사람이 서로 비슷비슷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이런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도 아니어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님을 양해하기 바란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