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릉주위에는 봉분 주위로 세운 돌기둥에 난간이 옆으로 다 연결되어 있었지만 흥덕왕릉에서는 사라지고 없었다.
누가 깨뜨려서 가져간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끼워져있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부터 끼워져 있지 않았다는 말은 너무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둘레석에 끼워져 있는 십이지신상의 조각들도 상당히 정교했다.
화강암에 이정도로 조각해 넣는 것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이 사진은 괘릉에 있는 십이지신상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봉분 옆으로 다가가서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래 사진은 괘릉의 모습이다. 이 사진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괘릉의 모습이다. 난간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봉분 위로 푸른 하늘이 아름답다.
무덤관리에 세심한 신경을 쓴다는 말이리라.
흥덕왕릉이라고 하는 증거가 발견된 사실이 있기 때문에 흥덕왕릉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시대의 왕들 무덤 가운데서 주인공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 아마도 무열왕릉과 흥덕왕릉 정도가 정확한 근거를 지닌 왕릉이 아닐까 싶다.
돌사자가 네마리나 남아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신라인들이 과연 사자구경을 해본적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중국을 다녀온 사신들이나 유학승 중에서 보고 온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상석가운데 어떤 부분은 최근에 보수해서 넣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돌 색깔이 그런 사실을 증명해준다.
나는 상석앞에서 석상들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왼쪽편 소나무 숲속에 비석을 세우기 위해 만들다가 만 귀부가 남아있다. 왕릉을 마주하고 선 상태라면 오른쪽 소나무 숲 속이다.
바로 이 돌이다. 머리부분을 다듬다가 그만둔 것 같다. 제작을 그만둔 원인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다.
몸에는 거북의 등딱지 무늬모양을 새긴 흔적이 아주 선명하게 남아있다.
머리부분은 미완성인채로 남아있다.
발 부분이다.
머리 모양을 옆에서 본 모습이다.
몸체의 크기는 정말 거대하다. 돌을 떼서 여기까지 가져온 뒤 현장에서 작업을 하다가 말았을까?
이제는 여기를 떠날 시간이다. 어쨌든 간에 흥덕왕릉은 괘릉과 흡사한 점이 많아서 신라시대 후기 왕릉 변천사를 비교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는 사실만은 틀림이 없다.
왕릉에 나들이를 나온 일가족의 단란한 웃음소리만이 솔숲에 잔잔히 메아리쳤다. 솔잎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신라 천년의 역사를 전해주는것 같았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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