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김씨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경순왕 김부의 아들로부터 시작하는 모양입니다. 남의 집안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으니 함부로 이야기 하기가 정말 조심스러워집니다.
의성김씨 홈페이지를 찾아보았더니 문중에 관한 자세한 내용의 글들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오늘 글들은 거기에 나온 내용들을 기초로 해서 써내려갈 생각입니다.
의성김씨 홈페이지의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종회 홈페이지는 또 따로있더군요.
이 아래부터 색깔이 다르게 나온 글은 그 중에서도 http://www.kim25.net/7837
에서 가지고 온 것인데 그쪽 글을 복사해와서 올린 것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이곳 지례예술촌(知禮藝術村)은 조선 숙종 때 임금의 잘못을 간하는 대사간이라는 벼슬을 지낸 의성(義城) 김씨 지례파 지촌 김방걸(芝村 金邦杰 1623-1695)선생의 종가로, 지금은 예술가들에게는 창작의 공간, 자녀들에게는 산 교육장의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종가에는 지촌 선생의 12세 종손 김구직(金九稷)옹을 모시고 김원길(金源吉) 차종손과 부인 이순희(李純熙)씨가 살고 있다. 지금은 종가만 남아 있지만 예전에는 일가 친척들이 모두 모여 30여 호 무리를 지어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모두 흩어졌지만 종가는 경북 문화재 46호 지정되어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 곳을 지키고 있는 차종손 김원길 촌장은 교수이며, 교수 이전에 시집을 세 권이나 낸 시인이다. 그가 실력 있는 교수직을 버리고 종가로 돌아와 예술촌의 촌장이 된 진정한 이유는, 종손으로서 집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늘 가슴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문화재로 지정된 아름다운 종가라도 종손이 그 집에 머물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종손 없는 종가는 죽은 집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더불어 건축물로서의 종가집 보존말고도 종손의 삶이나 전통 방식 자체를 보존하는 일도 중요한 정부의 문화재 지원 방향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으로 그가 이 넓은 종가를 돌보며 늘 생각한 것은, 이제 1남 2녀의 자녀들도 도시에서 각자의 사회 생활을 하고, 4대가 살아도 부족함이 없는 이 너른 집을 어떻게 돌볼까 고민하게 된 것이다. 빈집으로 둘 수도 없고, 일반인들에게 무작정 개방하면 종가가 훼손될까 걱정이었다.
결국 창작을 하는 예술인들에게 공간을 제공하자는 의미에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안동지부장’ 답게 이곳 종가를 예술촌으로 새 단장한 것이다. 좋은 공기, 속세를 떠난 자연의 소리를 느낄 수 있는 이곳은 창작의 산실이 되기에 충분했다. 벌써 종가가 예술촌으로 거듭난 지는 12년째다. 그동안 이문열, 구상, 유안진, 이어령 등 그 유명한 문인들이 다녀가며 감탄해마지 않았다 한다.
본채 뒷산에 있는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과 제사를 모시고 있는 주사 등 종가의 상징인 이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술촌을 찾는 예술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는 종가의 규모는 3천여 평의 대지에 경북 문화재 제 46호로 지정된 건물 10동 125칸으로 엄청난 규모. 종가가 이곳에 자리잡은 지도 자그마치 336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대유학자 학봉 김성일 선생의 맏형 약봉의 증손으로, 의성 김씨 지례파의 파종이 되는 지촌 김방걸 때부터다. 지촌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1689년에는 임금에게 바른말을 전하는 대사간이라는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당쟁의 시대에 살며 인형왕후 민씨 폐출의 비극을 보고, 벼슬을 버리게 되었다.
그 후 지촌은 지례촌에 정착해 그의 학문을 후대에 이어 많은 시인과 학자를 배출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김원길 촌장 역시 문인이었고, 종가를 지키며 생긴 에피소드나 구수한 입담을 담은 90편의 이야기가 숨어있는 ‘안동의 해학’이라는 책을 펴내 종가의 재미있고 진솔한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인용한 부분은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이었습니다. 문중의 종택을 소개해야하는데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글로서는 자세한 역사를 알 수가 없었으므로 문중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을 가져온 것이니만큼 양해를 해주면 좋겠습니다.
명문(名門)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집안이 아무렇게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세상살면서 깨달았습니다.
내가 제일 감탄한 것은 이렇게 큰 종택을 수몰지구로부터 옮겨왔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끈기와 집념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원길 촌장님께 그런 강단과 무서운 집념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고나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니 촌장님은 고등학교 선배님이기도 하셨습니다.
한참이나 나이가 아래인 후배에게도 반말을 쓰시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촌장님의 넉넉한 인품에 감탄을 합니다.
그런 마음가짐과 인품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지산서당 건물입니다.
어느것 하나 허투루 함부로 방치된 것이 없습니다. 종부되시는 사모님과 함께 두분이 이렇게 큰 집을 관리하시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텐데 깨끗이 유지되는 것을 보면 어지간한 부지런함으로는 견뎌내기 일일 것입니다.
종택을 방문하면서 공통적으로 받은 느낌이라면 단아함과 정갈함을 들 수 있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저 문간너머로 집안어른 한분이 곧 나타나실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으흠'하는 헛기침 소리와 함께 나타나셔서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실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나혼자만의 느낌일까요?
제가 이곳저곳을 다니며 구경을 하는 동안 촌장님께서는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계셨습니다. 외출준비를 하시는듯 합니다.
마당 한가운데서 연잎을 본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입니다. 작은 연못도 없는데 말이죠. 주인어른의 품격을 보여주는듯 합니다.
아(亞)자와 격자 형식의 전통 문살이 한옥의 아름다움을 더해줍니다.
여기가 안채인듯 합니다. 촌장님 내외분은 아마도 여기서 거주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생활에 해당하는 영역이라고 여겨서 직접 여쭈어보지는 않았습니다.
전통과 근대의 조화로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집안 여기저기에 우리의 조상들이 쓰시던 물건들이 보였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정감이 묻어나는 물건들입니다. 오늘은 정말 살맛나는 날입니다. 고택방문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으니까요.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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